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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ron A Dec 29. 2020

<맹크>(2020) - 데이빗 핀처

가치를 지키며 시대를 살아나가는 방법

 핀처의 이전 작품들 중에 이런 호흡의 영화가 있었나 싶다. 대사의 리듬은 흡사 스크루볼 코미디를 연상시키지만 내용은 현시대의 고삐 빠져 날뛰는 매체 권력의 논픽션을 보고 있는 느낌이다. 이러한 권력을 시원하게 비웃어주는(결코 응징하는 것이 아닌) 사람들은 파란만장한 일생 속에 늘 주류와는 비켜난 길을 걸었던 당시 꼬마 거장이라 불리는 천재 감독과 알코올을 달고 오늘만 사는 듯한 독설을 가차 없이 날리는 시나리오 작가다. 그리고 이 작가의 천재성은 작금의 현실까지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듯한 날 선 시선을 가지고 있다.


 그 시대 할리우드는 대공황이 무색할 자본의 집약으로 권력을 지키기 위한 탐욕의 발톱을 감출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야만의 시대이고 가지지 못한 자는 뼈아프게 이용당하고 버려지던 시대다. 아이러니하게 느껴지는 건 내일이 없는 듯 엄청난 말들을 쏟아내던 맹크는 그렇기에 자신의 걸작을 지켜낼 수 있는 의지를 관철시킨다. 하지만 이 <시민 케인>이란 걸작이 탄생하기까지 그가 진보적인 관점을 가진 작가라고 보기에는 무언가 모자란다. 그는 영화 말미에 이런 말을 남긴다. “나는 갈수록 내가 만든 덫에 걸린 쥐 같네. 덫에 틈이라도 생길까 자주 손을 보지. 내가 도망갈까 두렵거든.” 그는 자본의 탐욕이 판을 치는 그 세상 속에서 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버텨왔다. 자본이 휘두르는 악행들에 독설을 날리기도 하지만 그 독설을 즐기는 가진 자들의 위악 속에서 안전한 우산을 받치고 알코올과 도박을 즐겨왔던 것이다.


 하지만 맹크가 그 덫에서 어쩔 수 없이 미끄러지는 때가 찾아온다.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 결과가 나오던 날의 밤, MGM의 메이어는 다음과 같은 말을 던진다. “사실을 감정적으로 호소하면 사람들은 기대에 응해 바른 길을 선택한다.” 우리는 현재도 지겹게 보는 많은 현상들을 그 시대에서 목도한다. 얼치기 공산주의자라 매도당하는 민주당의 캘리포니아 주지사 후보 싱클레어는 메이어에 의해 MGM에서 거행한 거짓 공작의 주요 타깃이 된다. 배우들과 임금 삭감과 역시 거짓에 선동된 거의 실업상태에 놓였던 영화종사자들을 대동하고 질병에 시달리지만 감독이 되고픈 열망을 가진 카메라 감독을 이용해 거짓 다큐멘터리를 만든다. 맹크의 친구였던 카메라 맨은 결국 자신의 손으로 스스로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이렇게 만들어진 가짜 프로파간다들은 민주당의 싱클레어가 공화당의 메리엄에게 패배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위악의 극치를 보여주는 메이어의 발언에 맹크는 이렇게 응수한다. “그게 아니죠. 거짓말을 오래 떠들면 사람들이 믿게 된다.” 마지막 회상에서 맹크는 언론 재벌인 허스트의 파티에서 회심의 난동을 부리지만 허스트의 이야기 속 춤추는 원숭이가 되어 그 자리에서 조용히 쫓겨난다.  


  시간이 지난 후 맹크는 오손 웰스의 발탁으로 <시민 케인>의 원고를 완성한다. 작품을 수정하기 위해 오손 웰스와 존 하우스만 그리고 맹크가 한자리에 모였을 때 그는 모든 금전적 포상 앞에 크레디트에 오리지널 작가로서 이름을 올려줄 것을 요구한다. 지금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 같지만 오손 웰스는 불같이 화를 내며 크레디트에 이름이 올라가면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협박을 한다. 왠지 좀 생뚱맞아 보이긴 하는데 웰스의 이야기를 가만히 곱씹어 보면 저게 화내는 내용인지 걱정하는 내용인지 조금은 갸우뚱하게 된다. 어쨌든 모든 사람이 방해하고 만류하는 상황에서 맹크는 춤추는 원숭이의 마지막 자존심으로 작품과 저작권을 지켜낸다. 이렇게 탄생한 <시민 케인>은 영화 역사에 남은 최고의 걸작이지만 영화의 실제 주인공인 허스트의 끊임없는 방해로 인해 결국 흥행에 실패하게 된다. 그 이후 감독인 오손 웰스는 편집권도 박탈당하고 본인의 부재 시 영화가 난도질당하는 수모를 겪는 등 험난한 길을 걷는다. 하지만 꼬마 거장에서 꼬마라는 수식어가 사라지고 <상하이에서 온 여인>, <맥베스>, <악의 손길> 같은 걸작들을 만든 거장이 되었다.

 

 고전기 할리우드의 장르적 특성을 살려 그 시대의 할리우드 클래식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의 <맹크>는 <시민 케인>의 시나리오를 쓰는 1940년의 현재와 그의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던 30년대 대공황 시기의 할리우드의 탐욕을 작품이 쓰이는 동안의 맹크의 회상을 통해 보여준다. 스노우 볼을 떨어뜨리며 ‘로즈버드’라는 단말마를 외치고 죽어간 케인의 일생을 보여주는 영화 <시민 케인>도 ‘로즈버드’의 비밀을 찾아 나서는 사람들이 쫒아가는 케인의 일생을 플래시백으로 보여준다. 시나리오를 완성한 후 존 하우스만이 입이 마르게 칭찬하는 획기적인 스타일의 형식을 <맹크>에서는 성찰하듯 되짚는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맹크의 회한과 양심 그리고 그의 천재성이 <시민 케인> 영화를 완성해 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적으로 평가되는 이러한 클래식한 고전의 훌륭한 성찰보다도 글을 쓰고 있는 나에게는 대놓고 떠드는 가짜 프로파간다 가짜 뉴스에 의해 선거에 실패한 싱클레어의 에피소드가 너무 뇌리에 콱 박혀서 힘들었다. 거짓은 사람들의 감정을 선동해 가짜를 진실로 믿게 만든다. 어찌 1930년대의 그것과 지금 2020년의 그것이 달라지지 않는지 참담하다. 과연 가치를 지키고 증명할 방법이 있기는 한 것일까?   


 생각해보면 언제나 진보 가치의 최전선에 서 있었던 건 영화였다. 그리고 자본의 탐욕은 그 어떤 시절에도 본성을 감추지 않았다. 그 무지막지한 환멸 속에서 가치가 살아남을 수 있었다면 그 방법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이다. 어떤 가치든 상식과 정의에 맞는 것이라면 그것을 지키려 한 최소한의 양심과 나를 지키겠다는 자존감이 결국에는 오래오래 회자될 인류의 가치를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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