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편 & 재판편
방대한 원작을 영화로 만들어 내는 경우는 많지만 결국 그 원작의 깊이를 잘 해석하지도 못해 안 만드니 못한 경우도 있고 원작과 차별화된 남다른 해석으로 새로운 작품이 나오기도 한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미미 여사의 <솔로몬의 위증>이 2편의 영화로 만들어진 것을 보고 감독이 정말 용감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블경제의 붕괴로 인한 일본 사회의 변화를 집요하게 파헤치고 있는 미야베 미유키의 대작인 이 소설을 어떻게 이미지화 해 낼 수 있을지 이 영화는 한계가 너무도 명확히 보이는 지점에서 시작해야 하므로 감독은 엄청난 부담을 감내해야 했을 것 같다.
결론을 말하자면 스토리를 축약해 내는 과정에서 일본의 버블 경제로 인해 무너져가는 사람들의 반은 그냥 사라져 버렸다. 버블 경제의 아찔한 피해자가 될 뻔한 노다와 그의 가족이 사라져 버렸고 선생님의 옆집 여인의 사정이 사라져 버렸으며 치밀하게 얽힌 아이들의 관계도 느슨해져 버렸다. 물론 괜찮은 장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건을 덮으려 고군분투하던 교장의 사직으로 인해 조회시간에 모인 아이들이 동요할 때 은폐에 동조하던 선생들이 아이들에게 교가 부르기를 강요한다. 아이들의 교가제창 소리가 강당에 울려 퍼지고 조용해지는 아이들과 그 사이에 당황한 빛이 역력한 료코의 표정은 '전체의 안정'이란 이름으로 개인을 묵살하는 편리한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시작되는지를 아주 자연스럽게 잘 보여준다. 또한 재판을 제안하는 료코가 선생에게 폭행을 당하고 교장실로 딸을 보러 온 료코의 엄마는 내신에 악영향을 줄 거 같은 그 재판을 극구 반대했지만 고압적인 선생들의 태도를 보고 고소를 취하한다는 명분으로 료코가 재판을 열 수 있게 도와준다. 놀란 표정을 짓는 료코에게 엄마는 이렇게 말한다. “네가 모범생 흉내 내는 걸 그만뒀으니 나도 좋은 엄마 흉내 내는 거 그만둘래” 이 대사는 정말 인상적이었고 영화를 통틀어 정말 마음에 드는 씬이었다.
책에서 튀어나온 듯한 료코, 간바라, 주리, 마츠코, 이노우에 같은 아이들의 모습은 이 원작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작은 서프라이즈 같다. 하지만 원작에서 가장 입체적으로 변모하는 노다라는 캐릭터를 그냥 병풍으로 돌리고 노다의 양면, 악마성과 정의감을 둘로 나누어 가시와기와 간바라에게 나눈 것, 이것도 이해는 되지만 결국 이것이 이 영화의 패착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원작의 내용이 워낙 방대하니 내용을 축약시키는 것이 쉽지 않은 작업이었을 것임은 짐작이 가지만 이 영화에 대해 결론을 내리자면 죽은 두 사람을 선과 악으로 이분화시켜서 자살한 아이를 완전히 악마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경제 버블로 인한 풍요의 폐해와 사람의 선의와 정의가 비례할 수 있는지, 아니 인간은 근본적으로 정의로운지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보여주던 원작을 “그래서 사람들은 정의를 지키고 잘 살았어요.”란 전설로 마무리 지으며 아이들의 순진한 판타지로 바꾸어 놓았다. 도대체 이 영화를 왜 만들었는지 알 수가 없다. 이런 이야기는 굳이 <솔로몬의 위증>이라는 원작을 가져오지 않고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세상에 널린 뻔하디 뻔한 이야기인데 감독의 의식이 원작의 철학을 전혀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사건편 까지는 그런대로 볼만했는데 재판편에서 주리가 마쓰코의 부모님께 사과하고 오열하는 장면을 보고 기암 했다. 영화를 아주 쓰레기로 만들어 버렸다.
* 원작이 조금 바뀌긴 했지만 2016년 JTBC에서 했던 드라마가 나름 우리의 현실에 안착한 잘 만들어진 드라마였다고 생각된다. 나는 노다라는 캐릭터를 좋아하는데 드라마의 배준영(서지훈 분)은 노다를 꽤 잘 표현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건 순전 내 뇌피셜이지만 간바라의 이미지는 장동윤 배우가 정말 잘 어울렸던 거 같다. 나중에 나온 소설 <음의 방정식>에서 성장한 료코가 변호사로 나오는데 학자가 된 간바라가 가족으로 나와서 '픽'한 웃음이 났다. 원작은 중학생들의 이야기고 드라마는 고등학생들의 이야기라 완전히 달라진 면이 있기도 하지만 스토리가 워낙 방대하니 오히려 드라마로 푼 것 자체가 가장 현명한 방법이었던 거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