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해간다는 영국,
그래도 찐 선진국인 이유

영국 1년 살이의 기록들 12

by 물결맘



영국 살이 10개월 차, 이제는 '영국력'이 꽤나 향상된 것을 느낀다.

이제 회전교차로에 어떤 타이밍에 쫙 진입해야 하는지,

거의 집밥을 먹지만 아주 가끔 외식할만한 가성비 맛집은 어디인지,

근교에 놀러갈 만한 작은 도시는 어떤 게 있는지

영국 생활 데이터가 착착 쌓이고 있다.

간식류와 레디밀은 M&S,

소고기와 저렴한 기성품은 세인스버리,

치즈, 우유, 계란, 데일리 와인 등 생필품 PB상품은 집앞 리들.

마트에서 질 좋은 제품 골라내는 능력도 꽤나 향상되어

밥지옥이 처음처럼 그렇게 괴롭지는 않다.

하지만 이제 86일이 지나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아쉽냐고?

전혀! :)


뼛속까지 한국인인 나,

앞으로 절대 앞으로 그 어떤 순간에도 해외 장기 체류는 없다고

다짐에 다짐을 거듭한다.

평양냉면, 즉석떡볶이, 반반치킨 수혈이 시급하다.

한국 지하철 풍경을 찍은 유튜브 영상에 눈물을 쏟는다.

'집에 가고 싶다고!'

반면 12살 아들은 이곳에서 너무 잘 지내고 있다.

영국 사람들 흉보면 싫어한다. 이미 명예 영국인인 그...

계속 영국에서 살면 안되는지 묻기까지 한다. 한국은 방학 때 잠깐 들어가면 된다고.

'미안하다 아들. 엄마 아빠는 그 정도 재력은 안돼.'


***


요 몇 주 동안 집 앞 공사장이 꽤나 시끄러웠다.

소음은 그렇다치는데 바닥을 둥둥 울리는 진동까지 그대로 전달되는 게 꽤나 괴롭다.

그래서 낮에는 될 수 있으면 바깥에서 지내려 한다.

며칠 전 공원에서 산책 후 집으로 돌아오는데 공사장 담장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길가로 삐죽이 나온 나무와 작은 식물이 다치지 않도록

철제 팬스에 나무 모양으로 구멍을 내놓은 모습을 이제야 발견했다.

큰 나무는 그렇다 치는데, 무릎 높이도 되지 않는 작은 화초를 위해

계단 모양으로 홈을 파 놓은 게 아닌가!

이 광경을 보는 순간 '아, 이게 바로 영국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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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앞 건설 현장 담장. 길가로 삐져나온 식물이 다치지 않도록 섬세하게 벽면에 홈을 파 놓은 모습


영국 살이는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다.

일요일에 모든 상점이 오후 5시면 문을 닫는다.

사람들이 일요일 저녁을 가족과 함께 보내게 하려는 사회적 배려다.

덕분에 일요일 오후 4시 반쯤 마트는 장을 보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주말에는 오히려 밤 늦게까지 연장 영업을 하는 우리나라의 근로철학과는 근본적으로 배치된다.


차를 고친다던가, 서류를 접수한다던가 하는 업무 소요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린다.

뭔가 한번에 딱딱딱 진행되는 법이 없다.

그래도 영국 사람들은 다그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의 노동권을 존중하고, 불편을 감수한다.


병원 치료 예약시 장애로 인한 어시스트가 필요한지, 통역사가 필요한지 묻는다.

(하지만 예약은 몇 주 후에나 가능하다는 함정 ㅠㅠ)

어떤 이벤트에 참석하든 진행자는 가장 먼저 화재시 대피로를 안내해준다.


존중와 효율을 모두 챙기기는 쉽지 않다.

효율을 위해 길가로 나온 식물을 모두 잘라내고 펜스를 빠르게 지어

공사 기간을 줄이고 이익을 극대화할지,

식물을 존중해 한땀 한땀 철제 펜스에 홈은 내는 작업의 비효율을 감내할지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한다.


비록 불편하고 속이 터지는 일이 종종 일어나지만,

브렉시트 이후 영국 사람들이 점점 더 가난해진다는 말이 돌지만,

순간순간 이런 존중을 발견할 때마다

'아... 영국은 이래서 선진국이구나...' 감탄하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마켓컬리 사랑해요. 그리워요. 보고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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