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23 요코하마F.마리노스 - 가시와 레이솔
축구여행자
텅 빈 축구장의 관중석에 앉아 싱그러운 잔디를 바라보며, 여느 팀의 과거와 미래를 상상하는 것을 좋아한다. 축구장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일들을 관찰하고 기록한다. 축구 여행에서의 낯선 모습들로부터 많은 영감을 얻는다. 축구의 가치와 철학을 만들어 가는 풋볼 디렉터가 되고 싶다.
12:05 (킥오프 3시간 전)
사이타마에서 열린 르방컵 결승전의 풍경도 이러했다. 먼 길 원정을 떠난 세렛소 팬들의 입장 대기가 새벽 여섯시부터 시작되었다. 지정 좌석이 아닌 자유석에서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선수들을 보기 위해 이러한 모습이 펼쳐지는데, 이 날 가시와 레이솔 원정 팬들의 모습도 비슷했다.
일왕배 준결승전, 피치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팬들의 응원은 시작된다. 지나가는 버스를 향해 박수 갈채를 보내기도 하고, 버스에서 내리는 선수들과의 찰나를 놓치지 않고 응원의 목소리를 들려주려 한다. 오랜 기다림 끝에 입장을 시작하는 팬들이 응원가를 부르기 시작한다. 담장 너머 긴 행렬의 팬들도 노래를 이어가며 지루함을 달랜다.
양 팀의 중립 경기로 열린 도도로키 스타디움에는 20,696명의 관중이 들어찼다. 차가운 바람과 맞선 팬들의 기다림을 선수들과 교감할 수 있다면, 분명 선수들의 경기에도 영향을 줄 것 같다.
13:30 (킥오프 2시간 전)
도도로키 스타디움에서 가장 가까운 지하철 역 (신마루코역 新丸子駅 또는 무사시코스기역 武蔵小杉駅 에서 약 1.6km, 약 20분 도보 이동) 부터 적지 않은 거리를 도보로 이동해야 하지만, 역에서부터 유니폼을 입은 팬들과 함께 분주하게 걷기에 거리감을 느끼지 못할 때가 많다. 유난히 깃발 가방을 어깨에 멘 마리노스의 팬들이 눈에 띈다. 청백적의 삼색 우산과 깃발이 K리그의 수원과 닮았다. 확실한 내용은 아니지만, 마리노스와 수원의 슬로건 등이 비슷할 때가 많다. 'Home of Football', '트리콜로' 등의 문화는 팬들의 정체성을 돋보이게 한다.
남쪽 스탠드 바깥에 가득했던 가시와 레이솔 팬들과 달리 선수단 버스가 도착하는 서쪽 스탠드와 마리노스 팬들의 응원 구역인 북쪽 스탠드가 조용하다. 이른 시간 이미 경기장에 들어갔거나, 많이 오지 않았거나. 일왕배 대회를 운영하는 부스에는 천 엔 짜리 매치데이 프로그램 북을 판매하고 있지만 콘텐츠의 디자인이 아쉬웠는지 다들 들춰보기만 할 뿐, 평소처럼 구매하는 팬들이 많지 않다. 길게 줄지은 남쪽 스탠드를 외면하고 잠잠한 북쪽 스탠드로 경기장을 입장하고 싶지만, J리그의 입장 정책은 제법 까다롭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세분화된 입장권의 해당 출입구에 정확히 입장해야 한다. 대다수의 지역 어르신들이 입장하는 관중들의 소지품 검사를 도우며 지역을 위한 공헌 활동이 이루어진다. 지역 사회를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이런 활동들은 시니어의 삶에 대한 자존감과 연결되는 중요한 과정이 아닐까. 편의점에서 구매한 맥주 두 캔을 넘치지 않게 종이컵에 따른다. 축구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불필요한 상황들을 사전에 방지하려는 모습이다.
싱그러운 피치가 한 눈에 들어오면 좋겠지만, 도도로키 스타디움의 그라운드는 관중석과 거리감이 있다. 육상 트랙을 사이에 두고 축구를 바라보는 것은 정말 힘들다. 그라운드에서 누비는 선수들의 거친 호흡과 빠른 움직임을 살피기에는 한계가 있다. 가와사키 프론탈레의 팬들도 전용 구장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겠지.
예상과 달리 북쪽 스탠드의 마리노스 팬들은 가시와 레이솔 팬들보다 빠르게 경기장에 도착했다. 가와사키 현을 연고로 하는 요코하마 F.마리노스와 가와사키 프론탈레 두 팀은 지역 라이벌이다. 그만큼 도도로키 스타디움과 가까이에 살고 있는 팬들이 많아서인지 빠르게 관중석에 다다랐다. 이 날, 요코하마 F.마리노스 팬의 그룹 'Hamatra' 와 인터뷰를 약속했다. J리그에는 비영리 법인 서포터스가 두 팀이 있다. 쇼난 벨마레와 요코하마 F.마리노스의 비영리 단체는 자발적으로 모여 지역 축구팀의 사회 공헌활동을 자처하거나, '축구와 지역' 두 가지 키워드로 커뮤니티를 형성한다. 2014년 여름, 'Hamatra'의 사무실을 찾아 인터뷰를 진행했던 적이 있다. 3년 이라는 시간이 흘러 지금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앞으로의 계획은 어떠한지 궁금해 이들을 찾았다.
마리노스 팬들의 응원석에서 팬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한다. 메가폰을 들고 응원을 주도하는 이는 높은 단상에 올라 팬들의 박수 갈채를 받는다. 선수들이 그라운드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은 상황인데, 팬들은 관중석 한 켠에 모여 단체 응원가를 부른다.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서로를 독려하는 응원의 시작일까. 아직 킥오프를 앞둔 두 시간과 이후의 90분을 버틸 체력은 어떻게 할까. 마리노스의 팀컬러인 청백적 깃발이 하늘에 날리고, 팬들은 서로를 부대끼며 흥겨운 노래를 부른다.
15:00 (킥오프 5분 전)
남쪽 스탠드를 노랗게 물들인 가시와 레이솔 응원석의 특징은 꽤 다양한 연령대의 팬들이 모여 있다는 점이다. 가시와 시도 도도로키 스타디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서인지, 노란색 컬러로 가득 채운 팬들의 응원 열기가 뜨겁다. 가시와 레이솔의 등번호 8번 선수의 이름이 '바라다' 이다. 이렇게 예쁜 축구 선수의 이름이 있었다니, 가시와 레이솔의 팬이었다면 유니폼에 이 선수의 이름을 새겼을 것 같다.
오늘 양 팀에는 세 명의 한국인 선수가 있다. 요코하마 F.마리노스의 수비수 박종수 선수와 가시와 레이솔의 미드필더 김보경 선수가 선발 출전을 앞두고, 윤석영 선수가 가시와의 벤치 명단을 지키고 있다. 세렛소 오사카와 위건 애틀래틱의 홈구장에서 만났던 김보경 선수는 축구장을 직접 찾아 자신을 응원하는 팬들에게 근사한 팬 서비스를 한다. 매치데이 프로그램 북에 직접 싸인을 해주거나 사진을 찍고, 여행자들에게 건네는 질문을 보며 팬들을 위한 마음이 전해졌던 추억이 있다. K리그 전북 현대의 경기에서 쉽게 보다가 이번 시즌 J리그로 팀을 옮기면서 그의 플레이를 보는 것이 쉽지 않았다. 지난 가을, 우연히 가시와 레이솔의 감바 오사카 원정 경기에서 그의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가시와 팬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양 팀의 선수들과 팬들은 2018년 1월 1일, 사이타마에서 열릴 결승전만 바라보고 있다. 90분의 치열한 경기가 끝나고, 남은 한 경기를 우승하면 양 팀이 바라는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티켓을 거머쥘 수도 있다. 가시와 레이솔은 세렛소 오사카가 결승에 진출해 우승할 경우, 리그 차순위로 챔피언스리그 플레이오프 티켓을 얻을 수도 있다. 다른 팀의 경기 결과를 지켜볼 바에는 자력으로 우승하는 방법을 선택하겠지. 심판진과 선수들의 입장에 양 팀 팬들의 응원 소리가 더욱 뜨거워진다.
16:05 (후반전)
J리그를 여행하며 가장 부러운 점은 다양한 연령대의 축구 팬들이 온전히 축구를 즐기는 모습과 원정 팬들을 위한 오피셜 스토어가 열린다는 점이다. 이 날 역시 마리노스는 시즌을 총정리하는 DVD를 예약 판매했고, 레이솔은 새로운 신상품을 팬들에게 선보였다. 2018시즌의 달력과 추운 겨울을 위한 방한 용품을 구매하기 위한 팬들이 스토어 앞에 줄지었다.
언제부턴가 축구장에서 그라운드보다 그라운드 바깥을 더 관찰하기 시작했다. 축구장으로 향하는 이들의 라이프 스타일이 궁금하고, 축구를 어떻게 왜 좋아하는지 궁금하다. 2007년 우라와 레즈 팬들이 전북 현대의 원정 경기에 2,500여명 넘게 참여한 사회적 현상이라던가, 사간 도스가 축구장을 찾는 팬들에게 농산물을 나누어 주는 이유, 휠체어를 이끌고 관중석에 도달하는 팬들의 동선 등이 더욱 궁금하다. 바로 앞에 앉은 아빠와 딸은 사이좋게 따듯한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축구를 관람하고 있다. 추운 겨울날 반바지를 입고 온 딸이 감기에 걸리지는 않을까, 뒤에서 괜한 걱정을 보내기는 했지만 이들의 모습이 부러웠다. 아빠와 함께 취미 생활을 즐기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가시와 레이솔의 할아버지 팬은 혼자 경기장을 찾은 것처럼 보였는데, 90분 내내 일어서서 응원을 보낸다. 경기 도중 쓰러지면 어떻게 하려고 그리 열심히 뛰시나요. 외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좋아하는 것을 자유롭게 즐기는 J리그의 풍경이 머릿 속에 오래 남을 것 같다.
16:45 (후반 40분)
전반 11분에 터진 가시와 레이솔의 선제골, 후반 24분 한 골을 만회한 요코하마 F.마리노스의 동점골. 양 팀이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동안 자리를 피했다. 복잡한 지하철이 두려워 다른 이들보다 빠르게 경기장을 빠져 나왔다. 신마루코 역에서 시부야로 가는 전철을 기다리며 양 팀의 경기 결과가 궁금해졌다. 결국 시부야에 도착할 때까지 양 팀은 승부를 가르지 못했고, 연장 후반에 터진 비에이라 선수의 골로 마리노스가 결승에 진출했다는 소식을 한참 뒤에 전해 들었다. 세렛소 오사카와 요코하마 F.마리노스의 결승전에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일주일만에 도쿄로 다시 돌아올 자신은 없다. 대신에 한 달쯤 도쿄에서 살면서 인근에 있는 축구 팀들의 경기를 볼 상상을 하며 아쉬움을 달랜다.
20171223 축구여행자 가와사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