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다르다 서점일기 #40 졸업
1. 유년 시절, 부모님의 맞벌이로 돌봄의 의무는 학원의 몫이었다. 조기 영어 교육을 포함해 눈높이와 구몬, 피아노와 컴퓨터, 태권도, 웅변과 미술까지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정신없던 날들이었다. 매일 시내버스의 첫 차를 타고 출근하는 아빠와 공장의 생산직 역할이었던 엄마는 다른 분들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출근하는 부지런한 분들이었다. 집에 혼자 있기 싫어 아침 일곱 시가 채 되지 않아 학교에 도착해 수위 아저씨와 함께 문을 열고, 장기를 한 판 두는 삶의 여유를 가진 것은 가정환경 덕분이었다. 친구들에 비해 학교에 있는 시간이 많아 우유 당번과 화목 난로 당번을 자처했었는데, 지금 타인과 함께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커지게 된 계기였을까.
2. 사춘기 시절, 장애를 가진 형이 부끄럽지는 않았지만 형과 함께할 수 없는 사회가 싫었다. 형은 매번 위탁 시설에 맡겨졌고 당시 중등 특수 교육, 고등 특수 교육 과정이 온전하지 않았던 것 같다. 맞벌이 부부의 환경에서 지체 장애를 가진 자녀를 특수학교가 아닌 정신과 병동으로 보낼 수밖에 없는 부모의 마음은 어땠을까. 난 그 마음을 헤아릴 만큼 마음이 크지 않았고, 주말이면 이틀 내내 면회를 가는 아빠의 손을 붙잡기 싫어 열 발 자국 뒤에서 툴툴거리며 아빠의 뒷모습과 땅을 번갈아봤다. 아빠는 누구보다 검소한 분이었는데, 형이 좋아할 만한 음식을 잔뜩 싸들고는 왕복 5km의 거리를 걸었다. 한 번은 형과 시내버스를 탔는데 형이 자리에 앉기 전에 버스를 출발시키는 기사님이 얄미웠다. 노동 강도가 셌던 탓일까, 몸이 불편한 줄 알면서도 최소한의 배려는 없었고, 다른 승객들의 따가운 눈초리만 몰려올 뿐이었다. 한참 지나 대학교 휴학 중에 버스에서 일어나는 일을 기록하는 매거진을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인쇄까지 진행하지 못했지만) 매거진을 통해 버스에서의 아날로그 일상을 기록하고, 몸이 불편한 사람도 안전하게 버스를 이용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를 제안하고 싶었다.
3.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는 아웃사이더를 자처했다. 농구나 축구와 같은 공놀이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했지만, 마땅히 친구들과 대화를 나눌 만한 소재가 없었다. 짝꿍을 포함해 대여섯 명의 친구들과 교류하는 정도였는데 돌이켜보면 어떻게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는지 모르겠다. 한 번은 축구 유니폼을 수집하는 취미를 친구들에게 자랑한 적이 있었는데 일진 친구들이 유니폼을 훔쳐가 왕따를 확신했던 적도 있다. 또래 친구들과 싸움 한 번 제대로 해 본 적 없는 물주먹 소유자지만, 장애를 겪거나 왕따 친구들을 괴롭히는 일진과는 맞서 싸우려 노력했다. 나 또한 또 다른 왕따의 분류되었을 테니 더러워서 피했거나, 불편하게 만드는 상황을 꺼려했던 것 같기도 하다. 정의감 넘칠 정도는 아니었어도 최소한 피해자와 가해자가 구분되는 학창 시절이 끔찍이도 싫었다.
4. 축구 기자가 되겠다며 대학을 진학했지만, 대학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했다. 이때부터 줄곧 여행을 다녔던 것 같다. 유년 시절부터 부모님이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다녀오는 일상 여행을 즐겼는데, 돌이켜 보면 사색할 만한 시간을 가졌던 경험이었다. 스무 살부터는 치열하게 아르바이트를 했고, 내일로 여행을 비롯해 일본과 유럽에 가서 축구를 보며 꿈을 키웠다. 한 때는 한비야의 영향을 받아 NGO 단체에서 일해보겠다는 다짐도 했고, 일본 여행 작가 '다카하시 아유무'의 영향을 받았을 때는 세계일주를 함께할 수 있는 배우자를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일곱 번의 내일로, 칠십 번의 일본 여행, 다섯 번의 유럽 여행은 어떤 삶을 살겠냐는 질문에 명확한 대답은 아니어도 몇 가지의 힌트를 주곤 했다.
5. 군 복무 중에 형은 하늘나라로 떠났고, 전역 후 다른 학교로 편입을 준비했다. 일 년을 준비했는데 결국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했고 집과 가장 가까운 대학으로 전학을 선택했다. 초, 중, 고, 대학교의 반경이 3km가 되지 않는다. 도시에서 이렇게 삶의 반경이 좁은 경우가 있을까. 잠깐의 여행을 제외하고는 삶의 대부분을 반경 안에서 보냈다는 것이 놀랍다. 한 사람의 탄생부터 죽음까지의 반경은 얼마나 될까.
전학한 대학교에서 휴학을 하고는 꽤 많은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여행을 보내주는 대외 활동에는 기를 쓰고 도전했는데 서류 면접 근처에도 가지 못한 '박카스 국토 대장정' 대신 '비타 500 테마여행단' 프로그램에 합격했다. 4박 5일간 백두산과 고구려 문화를 탐방했는데, 이 곳에서 만난 친구들 덕분에 더 큰 꿈을 그릴 수 있었다. 이후에는 지금의 아내와 함께 '사라져 가는 것들'을 기록하기 위해 전국의 전통 5일장을 돌며 미숫가루를 나누는 <장터 유람기 1, 2, 3, 4> 프로젝트와 머무르는 여행을 해보자며 <도시여행자 : 한 도시에서 한 달 살기>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꽤 많은 축구 여행 기록을 모아 <축구여행자 : 축구와 지역사회> 프로젝트로 다듬었고, 버스 매거진을 만드는 <대전버스> 프로젝트도 진행했다.
6. '나는 어떤 직업을 가져야 행복한가', '무엇을 잘하는가', '지역사회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의 끝을 확인하지 못하고 학교를 휴학했다. 학교보다는 학교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이 더 즐거웠고, 많은 배움과 성장의 기회를 줬다. 자연스럽게 졸업이라는 단어는 나와 거리가 멀어졌다. 학창 시절의 경험과 아르바이트를 했던 수많은 서비스업에서의 경험을 봤을 때, 조직 생활에 능숙하지 못하다는 것을 느꼈다. 회사 생활보다는 환경을 만들어가는 직업을 택해야겠다고 다짐했던 순간이다. 자연스럽게 2011년 10월, 대전 대흥동 원도심에 '대전 여행을 안내하는 여행자 카페' 콘셉트와 '작업실' 기능을 위해 공간을 만들었다. 이게 벌써 10년이 다 되어간다. 직접 공간을 만들고 불특정 다수로부터 얻는 에너지로 꿈을 키우거나 프로젝트를 확장하기도 했다. 결국 학교 바깥이라서 가능했던 일이 아닐까. 지역에는 특정 인물이 드러나기 쉽지 않다. 대전만 해도 '성심당' 말고는 딱히 떠오르는 브랜드와 인물이 없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지역사회에서 바라는 역할이 커질 수 있었던 이유는 꾸준하게 공간을 운영하며 사람들을 만났던 것 때문이다. 점점 바라는 역할의 범위가 커져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지역에 공간과 사람이 브랜딩 되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커져간다.
7. 졸업에 대한 에피소드가 몇 가지 있다. 3년 전이던가, 특정 단체로부터 '휴학'에 대한 강연을 요청받았다. '대안적인 삶'이나 '커뮤니티 비즈니스', '로컬 브랜드'에 대한 강연은 숱하게 해왔어도 '휴학'에 대한 강연은 난생처음 받아보는 질문이었다. 강연을 듣는 대상자는 누구이며, 어떻게 이 강연을 기획하게 된 걸까. 기획자에게 질문을 던졌더니 '학생들이 휴학을 두려워한다는 것'이었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휴학을 하는 것이 뭐 그리 어렵다고 생각할까 싶었는데. 곧바로 취업을 앞둔 학생들에게는 잠깐 쉬는 타이밍이 과오로 남을까 걱정하는 눈치였다. 강연자는 제가 아니라, 학사관리팀에서 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김제동 씨처럼 말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무언가 영감을 줄 만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누구보다 휴학을 길게 한 학생으로 경험을 전하기에는 재밌는 시간이 될 것 같아 강연을 수락했다. 직접적으로 휴학하는 방법이야 학교마다 다르고, 본인이 찾아가야 할 길이지만 휴학을 길게 한 개인적인 이유와 사회적 배경을 이야기하면 몇몇 학생들은 본인의 삶을 고민하는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거라 믿었다.
또 하나는, 대학교에서 특강을 마쳤는데 휴학생이면 고졸이라서 강연비가 다르다는 것이었다. 전문적인 지식을 전달하는 강의야 능력에 따라 강연비를 차등 지급하는 것이 맞겠지만, 보편적인 이야기를 전하는 강연에서 학력에 따라 강연비를 차등 지급하는 것이 맞는지 의아했다. 조심스럽게 학교에 강연비에 대한 차등 지급 문제를 제기했고, 다행히도 이후에 이 시스템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전에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학교에서 휴학할 때 학과 사무실과 학사관리팀을 거쳐야 한다. 이때 학사관리팀 선생님이 보호자 도장을 받아오라고 한 적이 있다. 서른 살이 넘어 휴학을 신청하는데 보호자 도장을 받아와야 하다니. 행정 절차라는 것을 알면서도 잔뜩 화가 나서 아내 도장을 받아오겠다며 담당자 앞에서 큰 소리로 통화를 했던 적이 있다. 가장 긴 시간 동안 휴학을 한 학생이 졸업을 했으니, 학사관리팀 담당 선생님의 기분은 홀가분할까.
8. 어느 순간부터 부모님은 졸업을 했는지, 졸업을 하지 않았는지 헷갈리신다. 졸업한다고 이야기를 꺼내면 대학원 졸업으로 착각하실까 봐 말을 전하지 않았다.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세대라서 자녀에 대한 교육 열정이 강했던 부모님과 함께 학사모를 쓰고 사진 한 장 찍지 못한 아쉬움은 있지만, 기나 긴 휴학을 마무리하고 졸업하는 감정이 아무렇지도 않아 슬프다. 등록금을 보태주셨던 부모님께 미안한 마음만 가득하다. (휴학과 졸업에 대한 글을 쓰려했더니, 이렇게 할 말이 많아진다. 서점에서 손님을 응대하며 두서없는 글로 서점일기를 채우려니 또 미안하다.)
(서점원 라가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