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다르다 서점일기 #45 버스를 좋아해서 생긴 일
버스기사를 직업으로 꿈꾼 적이 있다. 지체 장애를 가진 형과 버스를 타며 느꼈던 불편한 시선이 쉽게 사라지지 않을 때부터였다. 몸이 불편한 사람들이 자리에 앉으면 운전을 하는, 승객이 인사를 하지 않더라도 꼬박 인사를 건네는 버스 기사가 되겠다고 다짐했었다. 맞벌이를 하던 부모님은 초등학교가 멀다며 버스를 타고 통학할 수 있도록 승차권을 넉넉하게 사주셨는데, 집과 학교를 오가는 버스 대신 먼 곳까지 버스를 타고 여행을 떠났다. 집 앞을 다니던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갔다가 집에 돌아오면 일터에 나갔다 돌아온 부모님이 저녁상을 차려 주셨다. 옆 동네 놀이터에 다녀온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집에 툴툴 들어가 함께 저녁을 먹었다. 풍선껌만 한 150원짜리 버스 승차권은 부모님을 기다리던 시간만큼 어디론가 데려다주었고, 스테이플러로 묶여 있는 버스 승차권을 쓸 때마다 낯설고 먼 곳으로 여행을 할 수 있었다. 버스 기사가 되기 위해 나름 몇 가지의 노력을 했다. 초등학교 앞을 지나가던 일곱 대의 버스 노선을 외워 노트에 적었더니, 머리가 좋은 것 같다며 칭찬을 받았다. 내친김에 대전의 모든 버스 노선을 외웠는데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엉뚱한 짓을 한다며 크게 혼나기도 했다.
하루를 시작하는 정류장에서 어떤 버스를 만날지 궁금하다. 유리창끼리 부딪혀 날카로운 소리를 내던 오래된 버스를 타면 괜히 하루가 심난할 것 같고, 반짝거리는 새 버스가 정류장에 들어오면 시작하지도 않은 하루가 상쾌하게 마무리될 것만 같았다. 기사님께 인사를 건네고 좋아하는 자리에 앉는다. 누군가 그 자리에 앉아 있다면 맞은편에 두 번째로 찜해둔 자리로 간다. 맨 뒤에서 두 번째, 혼자 앉을 수 있는 자리를 좋아한다. 가끔은 둘이 앉아야 하는 버스도 있지만, 변함없이 그 자리에 앉아 가장 늦게 옆 자리가 채워지기를 바란다. 어느 날에는 스무 개의 정류장을 지나 내렸는데, 버스에서 많은 일이 일어나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때부터 트위터와 인스타그램에 해시태그를 걸어 버스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버스 요금을 제대로 내지 않아 기사님께 혼이 났던 고등학생, 나처럼 트리플 에이형이라서 정류장을 지나쳤는데도 아무 말하지 못하고 다음 정류장에서 자연스럽게 내리던 사람. 귀가 막혔는지 시끄럽게 음악을 듣다가 기사님께 혼나 다음 정류장에서 곧바로 내린 청년까지.
"덕후가 세상을 바꾼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날, 버스 정류장에서 전동 휠체어를 탄 분과 마주쳤다. 벤치에 앉아 그가 어떤 버스를 타는지 유심히 관찰했는데, 버스 정류장에 버스가 제대로 서지 않아 그가 타야 했던 버스를 다섯 대나 보내는 것을 지켜봤다. 다행히 배차 간격이 짧은 버스였지만, 이미 지나간 버스가 준 상처는 돌이킬 수 있는 걸까. 겨우 여섯 번째 버스를 타는 그의 모습을 보고는 내가 타야 할 버스를 타고 출근했던 날이었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과 함께 버스를 타는 일은 어려운 일일까. 배차 간격을 맞추느라 정신없는 기사님, 버스가 들어오기도 전에 도로에 내려가 앞다투어 버스를 맞이하는 승객들. 일상에서 경험하는 모든 상황들이 답답할 때, TEDxDaejeon 팀으로부터 발표 제안을 받았다. 우리의 일상이 어떻게 도시를 바꿀지, 고민하는 사람들과 함께 발표를 했다. 나는 '버스 정차선'에 대한 발표를 했다.
( TEDxDaejeon City 2.0 https://youtu.be/64gaj7GIM40 )
우리가 이용하는 버스 정류장에는 파란색으로 그려진 'BUS STOP' 정차선이 있다. 버스를 이용하는 승객과 버스를 운행하는 기사님이 함께 버스 정차선을 지키자는 캠페인을 제안했다. 버스가 정차선에 닿기도 전에 승객들이 도로에 내려가 차에 오르면, 유모차와 휠체어는 버스에 오를 수 있는 기회 조차 사라진다. 우리에겐 도로에 내려가 버스를 탈 수 있는 선택권이 있지만, 장애를 가진 이들과 유모차를 들고 타는 승객은 선택권이 사라진다. 배차 시간을 맞추느라 바쁜 기사님이 이 상황을 온전히 기다려 줄 리 없다. 버스를 후진했다가 버스 베이 (Bus Bay)로 들어오는 일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버스 정차선을 지키는 일은 비장애인에게도 꽤 도움이 된다. 수도권의 경우에는 타려는 버스가 몇 번째로 도착하는지 안내를 하지만, 대전에서는 버스가 몇 번째로 들어오는지 알 수 없다. 집 앞 정류장에는 두 개의 'BUS STOP' 정차선이 있는데, 다섯 대의 버스가 동시에 들어올 때가 있다. 다섯 번째 버스를 타야 하는데 타러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다가 버스에 올라타면 기사님은 왜 뛰어오지 않았냐고 물을 때도 있었다. 내가 잘못이라도 한 걸까. 정류장 안에서 버스를 기다린 내 선택이 옳았던 것 아닐까.
버스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다 보니 버스 정책에 대한 회의나 발제를 몇 차례 참여했다. 버스를 좋아하는 청년의 목소리를 듣고 정책에 변화를 줄 수 있다니. 세상이 많이 바뀌기는 했구나. 대전에는 생각보다 대학교가 많다. 19개의 대학교를 다니는 학생들과 서비스 밀집 지역에서 늦게 퇴근하는 노동자, 버스 이용자를 생각해 새벽 한 두시까지 다니는 심야 버스를 만들자는 것. (코로나 이후에는 딱히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대전 방문의 해'를 맞이해 버스를 타고 여행할 수 있는 '원데이 패스'의 필요성, 가난한 밀레니얼을 세대를 위해 '월 5만 원 버스 정기권' 등의 새로운 정책을 제안했다. 뭐, 돌아오는 답변은 검토해보겠다, 혹은 현실 가능성이 없다는 대답이었지만 몇 번의 거버넌스를 통해 정책 변화의 가능성을 엿본 의미 있는 자리였다.
버스에 올라타 스무 개의 정류장을 지날 때까지 대여섯 가지의 에피소드가 머릿속에 남는다.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를 깊게 파고드는 재미는 놓칠 수가 없다.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라면 더 깊고 넓게 파고들만한 가치가 아닐까.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가진 덕후들을 여럿 만나고 싶다. (서점원 라가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