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마스크를 쓰고 사회적 거리를 지켜야 했다. 4-5인 이상 모임도 하면 안 됐고 가까이 몸이 닿기만 해도 감염될 듯 펄쩍 뛰는 느낌이 들었다. 2020년 1월 최초 확진자가 우리 지역에 발생했을 때는 누군가 코로나에 걸렸다고 하면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누가 알까 조심했다. 혹여 방문지가 많은 사람은 코로나를 퍼뜨린 주범같이 낙인 감마저 들게 하기도 했다. 지금도 주의하고 조심하는 건 매한가지지만 백신과 예방접종 덕분일까 공포감이나 두려움은 조금 덜어진 느낌이다.
확진에 재 확진까지 모두가 고생했고 너무도 잘 버티고 힘을 모아준 덕에(나만의 느낌일 수 있지만) 마음은 조금 편해졌다. 이제 야외 마스크는 더 이상 의무가 아니고 선택사항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아직은 야외에서 마스크를 쓴 모습이 더 많다. 마스크 벗고 밖으로 나오는 사람들이 많을 줄 알았다. 사람은 정말 많이 나왔는지 가는 데마다 어깨를 부딪히며 걸어야 했다. 주말이면 축제가 여기저기에서 벌어지지 가는 곳마다 사람 구경에 신이 났다. 오랜만에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을 봤다. 밖에를 안 나가니 알 수 없었는데 주말 동안 가본 곳은 사람 사람 사람...
군산 경암동 철길마을에 다녀오니 오래된 추억이 저 깊은 곳에서 끄집어내 졌다.
딱지, 성냥, 말, 교복, 명찰, 책가방, 교복모자, 파란색 운동복, 교련복, 노란 도시락, 양갈래 머리, 비눗방울 놀이, 뽑기, 쫀디기 등등
50대 어머니와 20대 딸인 듯 같이 교복을 입고 양갈래 머리를 땋인 곱게 내려 검은 끈으로 묶었다. "이쁜 여자, 잘난 여자" 명찰을 차고 사진을 찍는 모습이 예뻐 힐끔힐끔 자꾸 쳐다보게 됐다. 학교 다녀온 후 밤늦게 하얀 카라를 빨아 널어놓고 새벽 6시 매일 아침마다 밤 새 잘 마른 하얀색 카라를 반듯하게 다려서 검정 교복 셔츠에 붙여 학교에 가던 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긴 머리를 정성스럽게 양갈래로 땋아 야무지게 머리끈으로 묶어 양손으로 가지런히 머리를 쓸어내리며 단정하게 정돈하던 언니의 정숙한 모습은 그 당시 우러러보게 되는 나의 우상이었다.
다른 한쪽에서는 교복 대신 교련복을 입고 바지 한쪽 치켜올리고, 모자는 최대한 삐딱하게, 가방은 끈 따위 소용없고 겨드랑이에 무심하게 꽂아 끼웠다. 여기에 다리 한 짝은 또 살짝 흔들어줘야 맛이 나는데... 걸어가는 뒷모습이 한껏 껄렁거리려고 노력하는 듯 보였다. 오빠와 오빠의 친구들의 모습이 데자뷔처럼 떠올랐다.
두 살 많은 오빠는 아주 큰 어른 같았다. 학교를 1년 일찍 들어가서 3년의 차이가 났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오빠는 중학교 3학년이었다. 오빠가 학교에 가고 폭우가 쏟아지는 날에는 나와 남동생은 "우산 심부름꾼"이 되는 날이었다. 오빠가 중학교 1학년 때는 그래도 갈만했다. 그때는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이었으니까. 그런데 6학년이 되어도 "우산 심부름꾼"의 역할은 여전했고 그 나이가 되니 정말 가기 싫었다. 나와 남동생이 우산을 가지고 오빠가 다니는 중학교에 도착하면 오빠의 친구들이 창문으로 쳐다보고 먼저 알아보고 창문 안 교실을 향해 큰소리로 소리쳤다.
"00아! 동생 왔다!"
"어디? 어디? 00야 안녕!"
너도나도 할 것 없이 고개를 쑥 내밀고 인사를 했다. 우리 동네 오빠 친구, 옆동네 오빠 친구, 초등학교를 같이 다녀서 다들 아는 얼굴들이 까까머리 민둥이를 내밀며 반갑다고 아는 체를 하느라 목소리가 높아졌다. 나는 그게 정말 싫었는데 오빠 친구들은 인사를 한다며 너도나도 비슷하게 생긴 머리통을 내밀고 소리쳤다. 정말 부끄러웠다. 나는 이제 초등학교 고학년인데 이름을 막 부르고 사람들이 다 쳐다보고 웃음소리는 그치지 않았던 기억이...
나의 중학교 입학과 오빠의 고등학교 입학이 같은 날이니 중학교를 같이 다닐 일은 없었기에 오빠의 친구들을 그 이후로는 중학교에서 만나지는 않았다. 천만다행이었다. 나중에 오빠한테 얘기했더니 그런 줄 몰랐다며 미안해했다.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니 아이들과 연탄불에 둘러앉아 쫀득이와 소시지를 구워 호호 불며 쭈욱 찢어먹는 모습이다. 주황색, 노란색, 줄무늬, 설탕이 묻힌 호박 쫀득이, 꿀이 들어있는 것 등 모양이 다양했다. 뜨거운 연탄불에 양면을 뒤집으며 잘 구워야만 타지 않고 쫀득쫀득한 맛 좋은 쫀디기 구이가 완성되는 고난도의 기술이 필요했다.
여기에 빠지면 서운한 말 한마디 예상되는 말이 오가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라고 생각하며 자꾸 쳐다보고 어떤 것을 굽고 있는지, 잘 구워지고 있는지 보고 있었다. 아이들의 아빠는 그 사이 아이들에게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나 때는 말이야! 이걸 여기다 구워서 먹으면 진짜 맛있었지. 쫀디기를 연탄불이나 난로에 이렇게 구워 먹으면 훨씬 맛있고 부드러웠지. 이게 기술이 필요한 거야. 안태우고 잘 구워야 하는데 그게 기술이지! "
"에~~ 이, 그냥 구우면 되는 거 아니에요?"
아빠의 "라떼는~"에 아이들이 한 마디씩 하고 있다. 들리는 소리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같이 간 딸아이는 다른 사람 자꾸 쳐다본다며 빨리 오라고 앞서가며 불러댔다. 사람들 구경하는 것이 제일 재미있는 것 같은데 그걸 사람들이 싫어한다며 그만하라고 잔소리를 했다. 어느새 성장해서 이제 나에게 잔소리를 하는 딸이 되어가고 있다.
조금씩 가다 보니 어느새 거의 끝이 보이고 있다. 가게 안에 모여있는 5-6명의 교복 소녀들의 나이는 얼추 50대 후반 정도로 보였다. 친구들과 단체사진을 기념으로 남기기 위해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교복을 다시 입어본다며 서로가 서로를 단장해주고 이쁘다 칭찬해주고 있었다. 교복은 교복을 입은 세대와 교복을 입지 않은 세대, 새로운 알록달록한 교복을 입은 세대로 나눠진다. 중간에 잠시 교복을 입지 않아도 되는 시기가 잠깐 몇 년간 있었고 그 후에는 교복이 학교마다 색깔이 정해지고 예쁜 모양으로 디자인이 바뀌어서 정말 예쁜 교복이 많았다. 지금은 예쁜 교복이 더 많지만 그때는 정말 새롭고 예뻤다.
가게마다 다양한 추억의 물건들이 나와있어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요즘 세대들은 다시 레트로 감성으로 예전 것을 좋아하고 찾기도 한다. 음료수도 그렇고 스티커, 딱지, 장난감이 예전 것이 많이 나오고 있다. 여행지도 예전 추억의 수학여행지, 추억의 신혼여행지 등 기사들로 소개되고 있다. 코로나19를 겪으며 예전 것에 대한 좋은 추억이 떠오르고 감성이 풍부해지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다시 찾은 군산 경암동 철길마을에서 예전 것과 요즘 것을 구경하면서 풍성해지는 나의 감성을 느끼고 왔다. 젊은 세대와 충분히 공강함 수 있는 공간이 되어주고 있어 또한 좋은 여행이 되었다. 딸아이는 예전 이야기를 하면 "어른들은 점점 나이가 들면 '꼰대'가 되어간다"며 "라떼는~"은 왜 얘기하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나도 이제 "라떼는"을 곧잘 하고 있고 스스로 '꼰대'라고 인정하고 있다. 경암동 철길마을을 돌아보며 30살 넘게 차이나는 딸과의 같은 추억을 공유하고 만들고 온 것으로 충분하다. 오래 전의 나와 오늘의 나를 20대의 딸과 함께 나눌 수 있는 무언가를 또 하나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