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별하 Nov 10. 2023

다 쓸 데가 있는 무엇들

기억저장소 만들기

연한 갈색을 가루가 다 먹고 난 죽통에 가득 담겨 있었다. 무엇에 쓸려는 건지 모르는 묘연의 가루가 낯이 익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라면 스프였다. 꼬불꼬불한 하얀 라면은 어디로 간데없고 스프 가루만 한통 가득했다. 어디에 쓸 건지 물으니 '다 쓸 데가 있으니 신경 쓰지 마라.'라고 했다. 가루가 들어 있는 죽통 아래에 작은 비닐봉지가 가지런하게 정리정돈 되어 있다.


'이건 또 뭐지?'


그건 라면 속에 들어있는 고명으로 만든 건더기 스프와 라면 스프도 같이 있었다. 손을 대지 못하게 말렸다. 혹시라도 또 버릴까 봐 지레 걱정하시는 모습으로 이맛살을 찌푸리며 손사래를 치셨다. 행여 만지기라도 하면 금방 쓰레기통으로 사라질 걸 이미 알기에 절대적으로 만지지 못하게 멀찍이 치워놓으셨다.


언제부터인가 조그만 것들을 모아놓고 소중하게 정리해 놓는 습관이 생겼다. 비닐봉지를 모아서 차곡차곡 쌓아놓았던 적이 있었다. 집으로 오는 우편물 봉투를 잘 편 다음 구겨지지 않고 빳빳하게 눌러놓은 채로 모아놓기도 했다. 라면을 드시고 난 후 라면 비닐봉지를 손바닥으로 주름을 쫙 펴서 한 장 한 장 겹겹이 쌓아서 다 쓴 사각 휴지통에 정리해 놓았던 적도 있었다. 그런 것들은 나의 손에서 모두 쓰레기통으로 던져졌다. 이미 전력이 있었기에 이번에는 꿋꿋하게 지켜내리라 생각하셨는지 전보다 더 단호했다. 


다른 이야기를 꺼내며 자연스럽게 이야기의 주제를 바꾸는 데 성공한 나는 꼬리를 물어 질문하고 대답에 맞장구를 치고 연신 '아, 그러시구나"라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결 경계심을 풀어놓은 모습이 보였다. 이쯤이면 알아듣고 수긍하실 정도로 감정이 편안해진 것 같았다. 서서히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이거는 어디 쓸 데가 있어서 모은 거예요?"

"그럼, 다 쓸 데가 있어서 안 먹고 모은 거지. 라면 한 개에 스프는 반 개만 넣으면 두 개 먹을 때 한 개는 아껴서 모았어."


그냥도 아니고 아껴서 모은 거였다니. 이제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순순히 내어줄지 적절한 말을 꺼내야 했다. 신중하게 골라서 감정이 다시 격해지지 않도록.


"아이구 그러셨구나. 아끼고 아껴서 이렇게 모아놓으셨구나. 쉽지 않았을 텐데요."

"그럼, 한 참 모은 거라니까. "


라면 스프 봉지를 이리저리 뒤적이며 머리를 굴리느라 대답은 건성으로 하는 둥 마는 둥. 그러다 잘못하면 아예 꺼내지도 못할 형편이었다. 눈알만 또르르 굴리다가 시간이 흘렀다. 드디어 할 말을 찾아냈다.


"음... 그런데 이건 기간이 많이 지난 것 같아요. 먹을 수가 없는데요. 정해진 기간보다 한참이나 지나서 속에서 눅눅해졌나 봐요."

"그래? 벌써 그렇게 지났다고?"


이젠 더 이상 고집을 피울 수 없을 것 같았는지 아쉬운 표정이었지만 마음을 접는 듯 보였다. 그 틈에 한마디 더 거들었다.


"제가 버려드릴까요? 버리는 것도 일이잖아요."

"그럼 나야 고맙지."


라면스프도 이제 안녕. 쓰레기봉투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오늘은 그래도 쉽게 정리를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다음엔 또 어떤 것이 기다릴지 모르겠지만. 점점 모으는 것의 정체가 사라지기 바라며. 아름다운 순간들을 오래오래 기억할 수 있기를.


#치매 #기억 #사회복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