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잘 만났어?" S는 아무 감정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지친 무미건조한 목소리다. 밤 9시가 넘어 서울을 출발해서 우리는 늦게 청주의 3성급 호텔에서 숙박했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호텔이다. 모텔보다 호텔이 좋은 건 환해서이다. 왜 모텔은 어두컴컴하게 조명을 하는 걸까. 뭔가를 숨기는 장소라는 이미지는 그래서 더 만들어지는 건지도 모른다.
"시험은 잘 봤어?" 나도 무관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름만 쓰고 노래 가사라도 쓰면 학위 준다고 했는데. 너무 오래전에 공부한 거라 이제 내가 거기다 뭘 써야 하는지도 모르겠더라고. 지도교수가 친구잖아. 이 친구 새 차를 뽑았는데 신용카드의 위대성에 대해서 말하더군. 현금 하나 없어도 뭔가 살 수 있는 시대가 새삼 감동스럽다고 거기다가 36개월 할부라니."
나는 건성으로 "어"하고 대답했다.
"친구는 잘 만났어?" S가 다시 물었다.
난 대답을 바로 하지 못했다. 목구멍에서 뭔가 올라왔기 때문이다.
"라디오 들을래?" S가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라디오를 틀었다. 그의 오래된 차에서 나는 라디오의 둥둥 소리가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친구가 그러는데." 말을 금세 잇지 못했다. 울먹이는 소리를 그에게 들려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나보고 오빠랑 결혼 안 하길 잘했데." 다시 말을 멈추었다. "오빠.. 같이 살아보니 하나도 재미없데..." 난 그때부터 소리 내지 않고 울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랬다. D가 서있는 곳은 환했다. 그가 10미터 앞에 서있을 때. 내 눈앞에 보이기 시작할 때면 가슴이 쿵쾅거리지는 않았지만 마음에 눈부신 햇살이 들어온 느낌이었다. 그리고 입가에 저절로 웃음이 지어진다. D가 나를 기다리며 서 있는 모습을 볼 때면 봄날이 들어선 것 같다. D는 내게 그런 사람이다. 오랫동안 우리나라를 떠나 돌아왔을 때 친구는 내게 청첩장을 내밀었다. "나 결혼해. D오빠와. 올 거지?" 난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멈칫하다 웃으며 대답을 했다. "그래. 갈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난 그 결혼식에 가지 않았다. 친구들이 같이 가자는 연락에 조카를 봐줄 사람이 없어서 갈 수 없어라는 구차한 변명을 했다. 그리고 정말 나는 5살 난 어린 조카와 D가 결혼하는 날 하루 종일 같이 있었다. 조카의 손을 잡고 동네 한 바퀴를 돌면서 지금 쯤은 웨딩마치를 하고 있을까? 아니면 맞절을 하려나.. 주례사는 그들의 결혼식에도 아무도 안 듣겠지. 그들은 신혼여행은 어디로 갈까? 물어보지도 않았다. 물어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친구 중 하나는 내가 웃을 때 D와 닮았다고 했다. 둘 다 너무 바보 같은 순수한 웃음을 짓는단다. S는 시험을 보러 가기 위해 아침 일찍 나갔고 나는 친구와 이제는 친구 남편이 된 D와 약속을 11시에 잡았다.
그리고 3년 만이다. D가 그 환한 웃음을 지으며 내게 걸어왔다.
D와 친구 그리고 그들이 아들. 우리는 근처의 카페같이 생긴 식당에 갔다.
"점심 뭐 먹을래?" D가 물었다.
글자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알파벳을 읽을 수는 있지만 그 뜻은 모르는 사람이 되어 버려 제일 윗줄에 있는 메뉴의 이름을 말했다.
"오징어 덮밥이요"
그리고 그들은 주스를 주문했다. 집에서 나오기 전에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며.
잠시 낯선 침묵이 흘렀다.
어느 날 D가 나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고 했다. 나는 D를 친오빠처럼 따랐다. 정말 그는 내게 친오빠 같았다. 남자로서 좋아하기보다는 친오빠처럼 좋아했으니까.
"둘이 사귀는 거 맞니?" D가 물었다.
"어."
"그래. 그렇구나." . 내게 그녀와 그녀가 사귀는 조금 어린 남자 친구의 관계를 심증이 아닌 확신으로 알았을 때.
D는 슬퍼 보였다.
그리고 이젠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