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형아... 할머니 돌아가셨다...” 일주일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은 있었지만, 아무리 긴 시간을 준비한들 저 말을 듣고 괜찮을 수가 있을까. 우리 삼남매는 형의 차를 타고 대구로 올라갔다.
장례식장에 도착했을 때, 아빠는 텅 빈 장례식장에서 혼자 소주병을 기울이고 있었다. 아빠는 어떤 마음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한편으로는 한심해 보이고, 한편으로는 불쌍해 보이는 아빠에게 아빠가 상주니까 술 그만 마시고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했다. 그러나 아빠는 술잔을 놓지 않았다. 아빠를 믿기 보단, 형을 믿고 나를 믿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는 첫 단계부터 막혔다. 영정사진이 필요했다. 그러나 아빠도 우리도 영정사진으로 쓸 만한 사진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우리 모두 스마트폰이 있고, 폰에는 카메라 기능이 있건만 평생을 할머니와 함께했던 가족이면서 환하게 웃는 할머니 사진 하나 가진 사람이 없었다니. 우린 모두 정말 못난 자식들이었다. 다행히 최근에 할머니 사진을 하나 찍어둬야겠다 싶어 대충 찍어둔 사진이 몇 장 있었다. 사진 속 할머니는 늙고, 머리도 엉망이고, 표정도 일그러져 있었다. 컴퓨터 기술의 도움을 받아 주름도 지우고, 입꼬리도 올리고, 고운 한복도 입힌 사진을 보며 나는 한참을 울었다.
할머니가 기초생활수급자라 지원을 받긴 했지만, 그래도 장례식을 하는데 돈이 안 드는 것은 아니었다. 아빠는 백수였고, 형은 사회초년생, 나와 동생은 학생이었기 때문에 장례식 비용은 우리 가족 모두에게 부담스러웠다. 보통 부조금으로 충당한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아빠는 지인들 경조사만 있으면 그렇게 다 챙겼으면서 정작 본인 어머니 장례식에 부를 사람은 없다 했다. 대여섯명 정도에게 문자를 돌렸지만 그 사람들은 오지도, 돈을 보내오지도 않았다.
형과 동생은 보통 조부모 장례까지 챙기지는 않는다는 생각에 지인들의 조부모 장례에 가지 않았고, 그래서 지인들을 부르기 좀 그렇다 했다. 나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봐도 장례식 비용 모두 형이 부담해야할 상황.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자 싶어 나는 지인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꼭두새벽부터 서울에서 친구가 한 명 왔다. 고3 때 같은 반 짝꿍이었던 친구였다. 정말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운 마음, 멀리서 와 준 고마움도 있었지만, 본인도 취업준비생이면서 비싼 차비에 부조금까지 준비하고, 많은 시간까지 썼을 친구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그 친구가 서울로 올라가고 나서 친구들, 군대 동기, 선후배, 그 외 많은 지인들이 줄줄이 찾아왔다. 내게 할머니가 어떤 존재인지 알아서, 내 슬픔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고, 몇 푼 안 되는 부조금이라도 보태려고. 여러 이유로 사람들이 찾아왔다.
한 대학 동기는 나보다 우리 아빠와 시간을 더 보내면서 말동무가 되어주었고. 친하게 지냈던 동문 형님이 우리 친형의 친구였던 걸 알게 되기도 했고. 내 얼굴을 보자마자 눈시울이 붉어지던 후배나, 진짜 돈이 없어서 동기들끼리 천 원짜리 지폐까지 끌어 모아 찾아왔던 신입생들도 기억에 남는다. 그 사람들이 찾아와준 덕분에 슬퍼할 시간도 없이 시간이 흘러갔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한 푼 두 푼 모아준 돈으로 할머니 장례식을 잘 치룰 수 있었다. 형은 내 지인들 덕분에 도움이 많이 되었다며, 할머니 유골함은 가장 저렴한 것 말고 조금 더 비싼 유골함으로 준비하자 했다.
어머니였던. 스승이자 친구였던. 그리고 은인이었던. 나의 할머니께. 그 날 나를 위해 다녀간 수많은 사람들과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건 불우한 환경에도 나쁜 길로 빠지지 않도록 본인의 한 몸 자식들을 위해 희생한 할머니 덕분이었다고. 할머니의 장례식이 북적북적할 수 있었던 건 내가 아닌 할머니의 노력 덕분이었다고. 할머니의 삶은 멈췄지만, 아직 살아있는 나는 할머니의 희생과 가르침이 헛되지 않게 잘 살아가겠다고 꼭 말씀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친구들이 모두 돌아간 그 날 밤, 나는 할머니 영정사진 앞에서 꺼이꺼이 울기만 했다. 마음 속으로라도 의젓한 말을 했어야 했는데, 죄송하고 감사하다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 나는 그렇게 받기만 하고 드린 것은 없이 우리 할머니를 보내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