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30 지금이 아니면 다시 못 찾을 끼니를
아버지의 가게에 자주 놀러 오시던 돼지 아저씨는 늘 말씀하셨다. '지금 먹지 않은 끼니는 평생 찾아 먹을 수 없다.' 돼지 한 마리를 트럭 뒤에 싣고 오셔서 돼지 아저씨라 불리던 그분은, 생활의 지혜가 담긴 말씀을 자주 해 주셨다. 돼지를 키우는 철학자.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분의 다른 말씀들은 기억나질 않는다. 오직 남은 말은 '지금 먹지 않은 끼니는 ......' 이다.
단 하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평생 못 찾아 먹을까 봐 늘 끼니를 챙겼다. 잠이 부족한 학창 시절에도, 출근이 빠듯한 직장인일 때도, 남들은 거른다는 아침까지 살뜰하게 챙겨 먹고 다녔다. 그것도 대부분 밥으로 먹었다. 떡이나 빵은 밥이 아니다. 끼니는 밥으로 이어가야 한다. 물에 말아 허겁지겁 한두 술 먹더라도 반드시 밥이어야 했다.
문제가 생긴 건, 식구들이 하나 둘 집을 떠난 이후였다. 어제 저녁에 한 밥을 오늘 아침까지만 먹으면 되었는데, 해 놓은 밥이 밥통에 들어앉아 있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하는 양을 줄여도, 화수분 밥통인지 밥은 줄지 않았다. 구운 누룽지와 마른밥 사이의 굳기가 되어버린 밥은, 아침에는 무조건 밥이라는 원칙을 철칙처럼 지키더라도 먹기 쉽지 않았다. 변화가 필요했다.
부엌 한편에 시리얼이 있었다. 모든 식구들이 밥으로만 끼니를 잇지 않았다. 식구들이 남긴 시리얼이 식구들의 떠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떡도 아니고 빵도 아닌 과자 따위로 어찌 아침이 되겠나 싶어도 음식물 쓰레기를 만들기는 싫었다. 어떤 음식물도 쓰레기는 아니다. 두어 번 시식처럼 먹었다. 역시 정이 가는 음식은 아니다. 그래도 차마 버릴 수는 없었다.
치워버리기 위해 억지로 먹는 시리얼이라지만 기왕이면 맛있게 먹고 싶었다. 바싹 구운 누룽지를 찬물에 말아먹는 느낌을 바라지는 않았다. 보들한 밥에 길들여진 위를 조금이라도 위로하는 마음으로 바나나 반쪽을 썰어 시리얼 위에 얹었다. 거기에 단맛을 더한다면 억지로 먹지만 금방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키위청 한 찻숟가락을 담뿍 퍼서 뿌렸다. 그리고 우유를 부었다. 절대 끼니를 이을 수 없었던 시리얼이 끼니를 이어주는 훌륭한 계승자가 되는 순간이었다.
주로 아침에 먹는 시리얼은 빠른 음식이 아니었다. 오히려 기다림의 음식에 가까웠다. 뜸을 들이듯 우유를 붓고 최적의 맛을 찾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우유가 고루고루 스밀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성급하게 바로 먹는 시리얼의 바삭함은, 치기 어린 젊은 시절의 풋풋함 같다. 한 없이 가볍고 경쾌하지만 깊지는 않다. 시리얼에 무슨 깊은 맛을 바라겠냐고 하겠지만, 세상만사 알고 나면 어디든 깊이는 있다. 시리얼에도 풋풋함을 넘어선 깊은 맛이 있다. 그 맛이 좋아졌다.
안타깝게도 적당하게 스며들 시간을 맞추는 것은 쉽지 않다. 조금만 늦으면 시리얼은 어느새 흐물거리는 죽이 된다. 뭔가 먹어서는 안 될 물크덩한 무엇이 되어 입으로 들어온다. 조금만 이르면 시리얼의 바삭거림이 깔끄러움이 된다. 적당한 시각을 찾아야만 제대로 된 맛을 볼 수 있다. 부드럽게 닿으면서 씹을 때는 바사삭한 느낌이 살아있는 시각을 찾아야 한다. 출근 준비가 바쁜 바깥 양반일 때는 기다리는 동안 옷을 입었다. 옷을 입는 시간이 딱 맞춤한 시간이었다. 집 사람이 되고는 옷을 갈아입을 필요가 없어 그저 기다린다.
우유를 머금은 시리얼과 바나나 조각을 숟가락 위에 올린다. 크기는 작지만 수가 많은 시리얼이 첫맛을 시작한다. 촉촉하게 젖은 부드러운 첫맛이 혓바닥을 간지럽히는 사이, 남아 있는 바사삭이 치고 들어온다. 이에 질 세라 키위청의 톡톡 튀는 달달함이 빠르게 들어와 미뢰를 깨운다. 멈칫한 혀를 달래듯, 덩치에 비해 맛이 순한 바나나가 부드럽고 뭉근하게 쓰다듬는다. 그리고는 입가심하듯 매끄럽게 우유가 넘어온다. 각자 다르지만 어수선하게 들어와 흥겨운 잔치를 만든다.
매일 같은 방법으로 시리얼을 만들지만 매번 다른 결과물이 나온다. 바나나가 익은 정도에 따라서도 달라지고, 시리얼의 크기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크기에 따라 우유가 스미는 정도가 달라, 바삭함의 정도는 시리얼 알알이 모두 다 다르다. 그러니 시리얼엔 깊이가 있다고 해도 될 것 같다.
바나나와 시리얼을 건져낸 그릇에는 키위청 건더기와 몇 모금의 우유가 남아 있다. 이들을 잘 섞는다. 마지막 한 모금까지 달콤 새콤 부드러운 키위맛 우유가 된다. 훅 치고 들어왔던 강렬함을 덜어낸 맛들이 어우러져 여운을 남긴다. 덜어낸 뒤에야 제대로 어울릴 줄 안다.
마지막까지 그릇에 달라붙은 키위청 조각들은 숟가락으로 살살 걷어 올린다. 조각들은 이미 자신의 맛을 모두 내줘서 이 맛도 저 맛도 아니다. 그저 아쉬움의 맛일 뿐이다. 입맛을 다셔 보지만 어쩔 수 없다. 어쩌면 마지막 한 숟가락의 아쉬움 때문에 이전의 모든 숟가락이 맛있었는지도 모른다. 아쉬움 없이는 지난 모든 순간이 이처럼 아름답지만은 않을지도 모른다.
간단하고 간편하고 맛있지만 아쉬운 아침 식사가 끝났다.
정식 버전 퇴직을 했다. 여전히 시리얼을 만들고 찻숟가락으로 먹는다. 사람 모양만큼 찻숟가락 모양도 가지각색이다. 약간 큰 찻숟가락을 사용한다.
끼니 챙기는 것이 어려워 아예 끼니를 줄인 사람들이여 지금 먹지 않은 끼니는 평생 찾아 먹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