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타버전 퇴직. 일상 15

10:00 쓰고 싶지 않았지만 써야 했던

by 김기원

오전 열 시 자판을 꺼낸다. 희미해진 어제를 화면 위에 불러온다. 독수리 타법을 벗어난 손가락이 자판 위를 날아다닌다. 소리는 요란하고 손짓은 부산하지만, 주로 머무는 곳은 뒤로 가는 단추거나 지우는 단추 근처다. 깊은 한숨이 이어지고, 그리고 긴 침묵. 서로 알아 온 지 반백 년이 넘었건만 화면 위의 글자들이 낯설다. 자음과 모음이 서로 짝을 이루지 못한다. 말이 말이 되지 못하고 글이 글이 되지 않는다. 버벅 거리는 시간은 길어지고 쓰리다. 그래도 무슨 마법일까? 오전 열 시 다시 자판을 꺼낸다.

지금처럼 쓰기에 열심인 적은 없었다. 대개는 써야 하기 때문에 썼다. 가장 많이 쓴 것은 역시 일기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지 않고 내일 또한 크게 다르지 않으니, 일기는 매일 같은 내용이다. 일어났다 놀았다 잤다를 반복했다. 그래도 일기는 숙제라서 매일매일 써야만 했다. 그나마 쓰는 일기는 낫다. 그림까지 그려야 한다면, 이건 크레파스를 굳이 닳아 없애려는 낭비적인 행위일 뿐이다. 끝내지 못한 오늘의 일기가, 다 채워지지 않은 어제의 일기 위에 얹어진다. 그런데도 내일은 오고 일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바라던 목적은 어디 가고 꾀만 늘어가다 결국 매만 쌓여갔다.

숙제라는 이름이 붙어 본질을 흐리는 것이 일기만한 것도 없지만, 못지않은 것이 또 있었으니 때때로 찾아오는 기념일 글쓰기다. 가끔은 휴일과 함께여서 좋다. 하지만 오고 싶으면 혼자 올 것이지 쓰기는 왜 붙어오는지 모르겠다. 미역국을 먹으며 생일을 기념하듯, 기념일은 그날을 기념할 만한 행위를 하면서 기념해야 한다. 불 끄기 연습을 하면서 불조심하려는 경각심을 가져야 하고, 나무를 심으면서 산림녹화 의지를 다져야 한다. 역사를 기리는 일도, 간첩을 막는 일도, 모두 그만한 행위를 하면서 기려야 한다. 그런데 온통 쓰기로만 기념했다. 이쯤 되면 기념할 만한 일을 기념하기 위한 기념일일 아니라 글쓰기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글로 배운 사랑이 서툴듯 글을 쓰며 배운 기념일은 생활에선 잊히기 일쑤다.

생활을 관찰하고 반성하는 일은 국민 학생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중학교에 올라오니 일기의 굴레에서 벗어났다. 그래도 아직 기념일 글쓰기는 남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모두 쓰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각 반의 할당량이 있어고, 몇 명의 재능 기부와 또 다른 몇 명의 봉사 정신이 빛을 내는 순간이다. 기부할 재능도 봉사할 마음도 없었으니, 드디어 쓰기는 안녕이라 생각했다.

우체국에서 주최하는 전국 어린이 편지 쓰기 대회가 있었다. 편지를 쓰면서 편지 쓰기를 기념해야 하는데 역시 글쓰기로 편지 쓰기를 장려한다. 역시 할당량이 주어졌고, 선생님의 읍소형 협박에도 봉사하려는 재능 기부자가 없었다. 반 전체의 숙제로 주어졌다. 국군의 날 위문편지 이외에는 쓰지 않는 편지를 장려하기 위해 글을 써야만 했다. 어린이의 끝과 청소년의 처음 어디쯤에 있는 정신세계에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미사여구를 끄집어내서 정렬시켰다. 두서는 없고 내용은 더더욱 미약하지만, 원고지 매수는 채웠다. 제출했다는 사실 자체도 잊을 만큼 시간이 흐른 뒤, 전교생 운동장 조회가 있는 월요일 아침에 이름이 불렸다. 그날 있을 시상식 수상자를 미리 준비시키기 위해 부른 것이었다. 처음,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상을 받았다. 부상으로 큼직한 메달도 받았다.

뒷걸음치다 걸린 행운이지만, 혹시나 소질이 있을지 모른다는 내적인 의구심이 자랐다. 글쓰기 과제를 매번 떠맡아야 하는 재능 기부 대열에 서야만 하는 외적인 책무도 따랐다. 그 후로 각종 기념일, 대회, 백일장 등등에서 줄기차게 글을 썼다. 하지만 동원할 수 있는 미사여구는 이미 바닥이었다. 초심자의 행운은 초심에게만 오는 것이지 재심 삼심에게 오지는 않는다. 수상은 늘 비껴갔고 의구심은 의심이 되었다.

그래도 아주 허망한 일만은 아니었다. 쓴다는 행위의 어려움을 알았고, 재능 없음도 진즉에 눈치챘다. 자주 쓴다고 재능이 늘지 않는다는 사실도, 쓰기에는 주어진 재능이 크든 적든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 후로 오랫동안 관급 글쓰기는 물론 글쓰기 근처에서 어슬렁거리지 않았다. 쓰기 싫었지만 써야 하는 시절은 그렇게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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