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타버전 퇴직. 일상 16

10:00 쓰고 싶었으나 쓸 수 없었던

by 김기원

차려 놓으면 먹지 않겠다고 떼쓰고, 치우면 먹겠다고 보채는 아이처럼, 써야 할 때는 쓰고 싶지 않았다. 그 어떤 것도 써서는 안 된다고 할 때, 생뚱맞게 무엇인가 쓰고 싶었다. 온통 국방색으로 도배된 곳에서 먹고 자는 행위를 기록하는 것조차도 보안 사항인 그곳에서, 무엇인가 쓰고 싶다는 마음이 조그맣게 일어났다. 거대한 담론이나 빛나는 상상이 아니라, 매일 일어나는 보잘것없는 일상이더라도 쓰는 행위를 하고 싶었다.

허용되는 유일한 쓰기는 편지였지만 모든 내용이 허락되진 않았다. 양배추 김치가 며칠 계속 나온 일을 썼다가 끝내 부쳐지지 않은 편지를 목격했다. 편지 내용은 끊임없이 걸러야 했다. 속마음을 거르고, 초라한 현실을 거르고, 보안사항인 듯 보안사항 아닌 것들을 걸러야 했다. 걸러지고 남은 일들은 각색된 현실이거나 과거 우려먹기거나 과장된 미래에 대한 기대들이다. 걸러지지 않은 날 것을 쓰고 싶었다.

전장에서 살아남으려면 강인한 체력, 상황 분석력, 탁월한 전투력이 중요하지만, 전장 같은 현실에서 살아남으려면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잔머리였다. 합법적이지 않은 것 같은데 처벌이 따를 만한 불법은 아니고, 핀잔할 수 있지만 도덕적인 흠결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의 융통성이, 매일매일 훈련하는 전투력과 더불어 쑥쑥 자랐다. 비공식적으로 편지를 보낼 줄도 알게 되고, 공식적으로 허가되지 않은 책을 책을 숨어 보거나, 보안 아닌 보안 같은 사실들을 기록하는 잔머리가 자라났다.

머리만 대면 깊은 잠을 자던 때가 지나고 밤의 시간이 조금씩 길어졌다. 길어지는 시간만큼 생각의 시간도 길어졌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회상하고, 해결될 기미가 없는 현실의 문제를 고민하고, 언젠가는 돌아갈 두고 온 미래에 대해 걱정했다. 모든 고민은 안개처럼 밤에 몰려온다. 정해진 시간이 지나도 잠들 수 없는 날들이 잦아졌다. 희미한 실내등 아래에서 한참을 뒤척이다 이불속에서 손전등을 켠다. 숨겨 둔 책을 읽고, 글을 썼다. 갈 수 없는 과거가, 해결되지 않은 현재가, 걱정스러운 미래가 걸러지지 않은 글자가 되었을 때는, 남은 날들이 지난 날 보다 훨씬 적었을 때였다. 쓰고 싶었지만 쓸 수 없는 시간들이 쓸 수도 있는 시간들이 되었다. 하지만 남은 시간은 노루 꼬리만큼.


한 편의 글도 쓰지 않는다면 무척 행복한 것이다. 마음 깊은 결핍을 길어내는 일이 쓰기라서, 행복한 사람들은 글을 쓰려하지 않는다. 같은 초록이지만 국방색이 아닌 초록을 누리는 일은 가볍고 즐거웠다. 늘 보던 초록인데도 새롭게 아름다웠다. 짧아서 더 찬란했던 젊은 학창 시절엔 도무지 스스로 쓸 마음을 낼 수 없도록 세상은 즐거운 곳이었다. 그래서 글을 쓸 수가 없었다.

그래도 써야 하는 글은 있었다. 과제를 위한 건조한 글, 과제는 아니지만 소모임 전시를 위한 글, 강의 중에 함께 써간 쓴 글이다. 잘 써야 하고, 뛰어나게 쓰고 싶었지만, 결과물은 늘 어설펐다. 주인공이 죽어야만 서사가 끝이 나는 소설과 설익은 감정들이 뒤섞인 시들이다. 아직도 책꽂이 한편에 꽂혀 있는 글들은, 버려야 하지만 차마 버리지 못하는 애증이 되었다. 국방색 이불속에서 썼던 글들과 더불어 절대 봉인된 금서다. 쓰고 싶었지만 잘 쓸 수 없었던 시절의 쓰기는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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