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타버전 퇴직. 일상 17

10:00 잘 쓰지 못해도 쓰고 싶은

by 김기원

자리를 바꿨다. 배움에서 가르침으로 자리를 옮겼다. 자리만 바꿨다고 생각했는데 모든 것이 바뀌었다. 익숙하게 보던 것들이 낯설어졌다. 배우는 글이 자유롭고 아름다웠다는사실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가르치는 글은 풀거나 맞춰야 할 부담스러운 문제에 다름 아니었다. 유려한 문장을 느낄 짬도 없이, 오묘한 뜻을 새길 겨를도 없었다. 중요한 건 맞느냐 틀리느냐, 맞출 수 있느냐 없느냐였다. 정답과 오답 사이에서 방황하는 글은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었다.

다시 자리를 바꿨다. 가르치는 글이 떠나니, 익숙하던 글들이 새롭게 다가왔다. 자유롭게 이해하고 나름대로 표현해도 맞거나 틀리지 않았다. 그저 거리낌 없이 좋아하면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돌아오기까지, 세대가 바뀔 만큼의 시간이 걸렸지만, 끝끝내 잊지 않고 왔다.

일요일 오전. 이른 잠을 깬 고양이들만 어슬렁거리는 한가한 늦잠 시간. 오랜 습관처럼 눈이 떠졌다. 모든 것이 멈춰버린 듯한 공간은 적막하다. 한때는 자전거를 탔다. 살갗을 스치는 맑은 공기를 마시는 일은 상쾌했다. 상쾌함이 서늘함으로 바뀌고 다시 추위로 바뀌자, 더 이상 자전거를 탈 수 없었다. 집 안을 서성거리다 낡은 패드를 꺼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글을 쓰기 시작했다. 시작을 알리는 축포 한 방 없이 시작했다. 가진 소재라고는 추억뿐인지라, 자서전을 쓰듯 지난 일을 회고하며 써 내려갔다. 화면에 얼비친 얼굴이 보였다.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미소를 띤 채 열심히 무언가를 하고 있는 모습이 낯설었다. 그러나 싫지는 않았다.

글쓰기 수업을 신청했다. 잘 알면 더 잘 쓸 수 있고, 잘 쓴다면 더 열심히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가까운 공공기관에 개설된 글쓰기 강좌를 신청했다. 고정 회원들이 있었고, 그들은 반복해서 듣고 있었다. 견고한 그들의 틈에 스며들기는 쉽지 않았다. 써 온 글을 함께 읽고 토론하는 방식으로 강좌는 진행되었다. 제출한 글에 대한 그들의 진정 어린 말에, 발가벗기는 듯 부끄러웠다. 글을 잘 써야겠다는 다짐보다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다. 결국 강의의 반도 다 참석하지 못한 채 그만두었다. 첫 글쓰기 수업은 부끄러움만 남긴 채 끝났다. 수업은 끝났지만 부끄러움을 안긴 글 몇 편은 남았다.

베타 버전 퇴직을 하고, 온전한 집사람이 되었다. 집안일은 열심히 해도 표가 안 났다. 안 하면 금방 표가 난다. 표를 내려고 온종일 종종거려도 생각만큼 표가 나지 않았다. 표는 나지 않아도 하루는 너무 빨리 지나간다. 집사람이 되면 여유롭게 더 많은 글을 쓰리라는 생각은 그저 예상일 뿐이었다. 남는 것 없이 시간만 보낼 것이 두려워 다시 글쓰기 수업을 신청했다. 소규모로 진행하고, 다른 사람과 글을 돌려 읽지 않으며, 출간 작가가 운영하는 강좌였다. 수강료는 공공기관에 비할 수 없이 비쌌지만, 미래를 상상하며 흔쾌히 지불했다. 매주 과제도 있었고, 강의 시간에도 간단한 글도 썼다. 개인별 첨삭이 이루어졌다. 매번 기다려지지만 매번 부담스러웠다. 어느덧 강의가 모두 끝났다. 짧은 문장을 긴 글로 만드는 요령과 연습의 흔적으로 몇 편의 글이 남았다.

글은 언제 가장 잘 쓸 수 있을까? 마음속에 꺼내고 싶은 무언가가 있을 때이다. 하지만 그런 때는 흔치 않다. 마음속에 뭔가가 잘 없고, 있어도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알아차려도 다른 방식으로 소비한다. 그래서 글을 잘 쓸 때는 기한이 주어진 과제로 쓸 때다. 늘 원고 마감에 시달린다면서도 좋은 글을 써내는 작가들의 이유를, 두 번의 글쓰기 강좌를 통해 알게 되었다.

10시 글을 쓰려고 자판을 꺼낸다. 마음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는 무엇인가를,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길어내는 스스로의 마감 시간이다. 잘 길어내고 있는지는 모른다. 객관적인 이야기를 기대할 수 있는 주관적 관계가 없어서다. 잘 쓰는지는 몰라서 그냥 쓴다. 쓰고 있을 때는 자주 미소를 짓는다는 것만은 안다. 유혹이 많아서 언젠가는 강한 미소를 짓게 하는 일이 나타날 것이다. 영원한 사랑 같은 것은 없으니까. 그래도 오늘까지는 유효한 사랑인지라, 오늘도 글을 쓴다. 잘 쓰지는 못해도 쓰고 싶은 시절이다.


정식 버전 퇴직 후 브런치 스토리를 시작했다. 의지처럼 표리부동한 마음이 없는지라, 겉은 단호한 척하지만 속은 무르기 그지없다. 혼자 있을 때 쉽게 물러지는 속을 단단하게 채우려고 떠벌리기로 했다. 혼자 있지만 누군가와 늘 함께 있는 전산망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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