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타버전 퇴직. 일상 18

11:30 언젠가는 오늘 보다 잘하는 날이 올 거야, 홀라 에스파뇰

by 김기원

꼭 필요한 것들은 쓸려고 찾으면 없다. 있더라도 충분하지 않으며, 짧은 시간에 모으기도 쉽지 않다. 지혜가 그렇고, 인간관계와 체력이 그렇다. 돈도 그렇다. 조금씩 조금씩 모았다가 필요할 때 써야 하는데 꾸준하기가 쉽지 않다. 자칫 방심하면 한순간에 송두리째 잃는 경우도 생긴다.

꼭 필요하지는 않지만 있으면 생활이 풍요로워지는 하나를 더하자면, 우리말이든 외국어든 언어를 부리는 힘이다. 말을 잘하는 힘, 글을 잘 쓰는 힘은 생활을 즐겁게 한다. 때로는 멋들어져 보이게 한다. 그러나 우리말이든 외국어든 쉽게 부릴 수는 없어서 조금씩 조금씩 힘을 쌓아야 한다.

자유로운 여행을 꿈꾸면서 바랐던 것은 유창한 듣기 말하기였다. 많은 이들의 바람이었는지, 요즘은 통역 기능이 손전화에 실려 있다. 말 못 할 걱정은 덜었지만, 눈을 보며 말하는 것과 화면을 보며 말하는 것, 실시간으로 말하는 것과 시간차를 두고 말하는 것이 같을 수는 없다. 그래서 능숙한 모국어와 모국어만큼 편안한 외국어 하나-특별히 영어-를 잘하는 것은 오래된 바람이다.

외국어 교육 앱 하나를 소개받았다. 새로운 도구가 생기니 결심도 새롭다. 배움에는 가끔 도구빨도 필요하다. 앱을 설치하고 새로운 도구를 살핀다. 가르치는 언어가 꽤 많다. 이디쉬어나 나바호어 같이 처음 듣는 언어도 있다. 그중에는 스페인어도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당연하지 않은 것처럼, 처음 듣고 보는 신기한 언어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눈에 들어왔다.

스페인에 두 번 다녀왔다. 가우디를 보러 바르셀로나에 갔었고, 구겐하임 미술관을 만나러 빌바오, 고야를 만나러 프라도 미술관에 갔었다. 기약은 없지만 언젠가 다시 만나러 오겠다는 일방적인 약속을 남기고 떠나온 스페인. 아직 가보지 못한 안달루시아의 아람브라 궁전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고, 산티아고 순례길의 작은 도시들도 그럴 것 같다. 어쩌면 스페인어를 주로 쓴다는 중남미의 도시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스페인어 안에는 해묵은 일방적인 약속이 있었다.

그래도 막상 시작 단추를 누르려니 생각이 많아진다. 하나라도 잘하는 것과 조금씩 할 줄 아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나으려나. 영어를 잘하는 것도 버거운데 스페인어까지 할 수 있을까? 그 시간에 영어를 조금 더 능숙하게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사실 영어가 능숙한 편은 아니다. 한두 살 아이에게 말하듯 해야 잘 들리고, 두세 살 아이처럼 말한다. 영어만 잘해도 자유로운 여행에는 문제가 없다. 그러니 스페인어를 배우려는 시간에 영어를 연습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조금이라도 알면 보이는 것이 다르다. 보는 것이 다르면 문이 하나씩 더 열린다. 수많은 문 뒤에는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즐거움이 있다. 스페인어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못 보던 스페인이 보이고, 스페인을 향한 문이 열리지 않을까? 스페인어를 하지 않는다고 영어를 더 열심히 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그래, 결심했어! 스페인어도 시작이다! 시작 단추를 눌렀다.

배우는 일은 늘 재미로만 가득하지 않다. 성장이 눈에 보일 때는 재밌지만, 보이지 않을 때는 긴 인내만 요구된다. 백지일 때는 성장이 눈에 보이지만, 아는 것이 조금만 쌓여도 눈에 보이는 성장은 줄어든다. 그러나 끊어지지만 않는다면 언젠가는 다시 눈에 띄는 성장의 시기가 분명히 올 것이다. 끊어지지 않으려면 부담이 없어야 한다. 그래서 집사람의 스페인어는 느슨하지만 꾸준히 가기로 했다. 끊어지지만 않고 가다 보면 시작한 날보다 더 나은 날이 언젠가는 올 테니까.


정식버전 퇴직 이후에도 스페인어는 계속되고 있다. 멈추지 않는 느슨함이다. 완전히 느슨해지겠다는 의지는 더욱 강해져서, 배움이 일어나는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래도 길고 가늘게 이어진다. 스페인어는 여전히 아주 조금씩만 재밌다. 기억나지 않는 답답함은 더 잦아졌다. 게으른 축적의 시간을 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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