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0 라면을 끓이면서
집사람이 되니 좋다. 있는 척, 잘난 척, 센 척, 착한 척, 힘든 척, 척척척 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목이 축축 늘어난 옷을 입어도, 날이 더우면 헐벗어도 된다. 하기 싫은 일은 미루고, 하고 싶은 일은 잽싸게 한다. 잘하려 동동거릴 필요도 없고, 애면글면 마음 쓰지 않아도 된다. 백만 가지쯤 좋은 점을 나열할 수 있다.
그렇다고 집사람의 생활이 완벽한 것은 아니다. 큰 흠 중에 하나는 바깥 양반들이 부러울 때가 있다는 것이다. 매일 정오 한 번씩은 바깥 양반의 생활이 부럽다. 점심을 차릴 때다. 처음 몇 번은 즐거움이었고 가끔은 즐거움이지만, 늘 즐겁지는 않다. 해결해야 할 무엇이 되기 일쑤다. 점찍듯이 먹으라고 점심이라지만, 오늘 점심은 일생에 딱 한 번뿐이니 점찍듯 먹을 수 없다. 그렇다고 잘 차려 먹기에는 버거울 만큼 자주자주 찾아온다. 가난한 집 제사 돌아오듯 한다.
직장인의 최대 고민이 점심에 무얼 먹을까라는 우스개 소리가 있었다. 집사람에게는 우스운 말이라기보다는 부러운 말이다. 선택지가 얼마나 많으면 고민까지나 할까, 아니 그보다 선택할 수 있다는 자체가 즐거운 일이다. 더군다나 남이 해준 음식 중에서 고르는 일이라니 더할 나위 없이 부러운 일이다. 집사람에겐 선택지 자체가 많지 않다. 게다가 선택이란 손수 만들어야 한다는 전제가 깔린 것이라 바깥 양반들의 고민과는 질적인 차이가 크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은 남이 해준 음식이라는 명언을 생각해 보면, 바깥 양반들의 고민은 사치에 가깝다.
생각해 보면 감사하게도, 한때는 바깥양반이었고 그때는 급식이 있었다. 무엇을 먹을지 선택의 고민이 없었고, 영양도 걱정해 줬고, 청결하게 조리까지 해 줬다. 차려진 밥상을 맛있게 먹으면 되는데도, 가끔 감사하고 자주 불평했다. 비슷한 음식이 거듭 나온다고, 간이 맞지 않는다고 투덜댔다. 돌이켜보면 철없는 바깥 양반 시절의 투정이다. 균형 잡힌 영양을 갖춘 음식을 매일 챙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맛까지 챙긴다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누군가 대신 점심을 챙겨 준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이고 행복이었는지 집사람이 되고 나서 알았다.
12시를 알리는 소리가 들린다. 덩그러니 혼자 남은 집사람은 점심을 챙긴다. 음식을 준비하는 것은 이타적인 행위라고 했던 방송인의 말이 떠오른다. 누군가와 함께 하는 저녁 준비는 고민으로 시작하지만, 혼자 먹는 점심은 때우는 일이다. 어제 저녁이나 오늘 아침의 연장선에 있다. 가끔 어제저녁이나 오늘 아침이 깨끗하게 먹었다면, 그때가 본격적으로 고민할 때다. 라면을 끓일 것이냐 국수를 삶을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혼자 먹더라도 잘 차려 먹어야 한다는 사람도 있다. 남을 대접하듯 스스로를 잘 대접해야 한다고도 한다. 그러나 잘 차리기 위해서는 앞뒤로 품이 많이 든다. 그 일을 스스로 해야 한다면 잘 차려먹는 것이 도리어 자신을 괴롭히는 일이 될 수도 있다. 드라마처럼 우아하게 먹으려면 화면 밖에서 일하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잘 차리지 않는 것은 어쩌면 스스로를 위한 최소한의 배려일 것이다.
집사람에게는 잘 차려 먹는 것보다 잘 챙겨 먹는 것이 필요하다. 잊지 않고 먹는 것, 귀찮다고 넘어가지 않는 것이 먼저다. 덩그러니 남겨진 집에서 혼자 먹는 음식이 아무리 잘 차려진들 무엇이 그리 좋겠는가? 그러니 음식의 기본에 충실한 한 끼를 잘 챙겨 먹는 것이 중요하다. 다행스럽게도 집사람에겐 간편하면서, 필요 탄수화물을 30% 가량 해결해 주는 음식이 있다. 게다가 맛도 다양하다. 요즘은 해외에서 더 난리다. 그래서인지 해외에 나가면 더 찾게 된다. 여기가 외국인양 조용히 라면을 끓인다.
쓰고 보니 혼자 먹는 점심이 궁상맞아 보인다. 가끔 그렇지만 대개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혼자서도 씩씩하고 맛있게 잘 먹는다. 라면 먹는 모습도 플렉스하도록 넷플릭스가 있으니 파김치나 갓김치를 얻은 듯 든든하다.
*플렉스 -영어에서 온 말로 과시하다 뽐내다의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