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타버전 퇴직.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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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기원

베타버전 : 정식 출시 전 테스트를 위해 사전에 배포되는 버전을 가리켜 베타버전이라고 한다.


군대를 국방부 소속 학교라고 친다면, 국민 학교 입학 이후 꼬박 48년을 학교에서 지냈다. 때로는 배우는 자로, 그보다 더 긴 시간을 가르치는 자로 있었다. 학교의 희망이 졸업이듯, 직장의 희망은 퇴직이다. 어느덧 퇴직을 곧 맞아야 한다는 생각이 서서히, 그러나 강하게 엄습했다. 정년까지 남은 햇수가 한자리 숫자라서도 아니고, 알았던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서도 아니었다. 모든 직업의 기본이 경제인 것은 맞지만, 어떤 직업도 경제가 전부는 아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경제 이외의 것을 학교에서 찾기 어려웠다. 그래서였다.

시인은 자신을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었다고 노래하지만,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학교였다. 학교를 뺀 기억은 아득한 젖먹이 시절만큼이나 희미하다. 학교 없는 미래를 생각할 수 없었던 때도 있었다. 모든 청사진은 학교와 연관되었던 때였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학교 없는 길을 더 자주 상상했다. 그리고 두려웠다. 가보지 않은 길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무지는 불안을 부른다.

베타버전 퇴직을 하기로 했다. 월급 없는 휴직. 미리 퇴직해 보고 아니면 빠꾸. 만약 빠꾸한다면 정년까지 남은 기간은, 의미는 찾는 것이 아니라 부여하는 것이라는 말을 기도문처럼 외치며 버틸 것. 간신히 생각해 냈지만, 세상일 다 그렇듯이 원한다고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베타버전 퇴직이 성공하려면 세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재무, 건강, 시간. 어느 것 하나 넉넉하게 가진 것은 없지만 전혀 없는 것도 없다. 보험을 해약하고, 요리조리 새는 지출을 막으면, 베타버전 퇴직 기간 동안 최저생계비는 충당할 수 있겠다는 계산이 섰다. 돈은 들어오는 것보다 나가는 것을 관리하는 게 중요하다.

몇 년 전 시작된 만성 질환은 퇴직과 상관없이 평생 관리가 필요하다. 오히려 베타버전 퇴직 기간 동안 더 잘 관리할 수 있으리라. 다만, 문제는 시간 관리다. 직장에 있었는 여덟 시간, 출퇴근 시간까지 더하면 하루에 열 시간이 생긴다. 직장에 매여 할 수 없었던 일들 가령, 운동, 악기, 그림과 같은 취향만을 즐기기엔 지나치게 넘치는 시간이다.

시간 관리의 핵심은 일상의 관리다. 새롭게 생긴 열 시간을 원하는 모양대로 모자이크할 힘이 필요했다. 출근하지 않는 시간에 하고 싶은 일들, 혹은 출근하던 때에 했던 일들 중에서도 계속하고 싶은 일들을 모았다. 소요되는 시간을 나누고 시간대를 정했다. 방학 맞은 국민 학생처럼 하루 일과표를 그렸다. 하루치 동그라미 안에 하루 일과를 꼼꼼히 적었다. 적자생존. 적는 자 만이 살아남는다. 살아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하루를 일지처럼 적기 시작했다.


베타버전 퇴직은 끝났다. 정식 버전 퇴직을 했다. 그래도 일상은 돌아가고 여전히 적는다. 가끔 만나는 사람들이 뭐 하고 지내냐고 묻는다. 마치 여생을 사는 것처럼 묻는다. 여생은 없다. 그저 각자의 인생을 시기에 맞게 살 뿐이다. 직업이 없다고 일이 없는 것도 아니고, 삶이 끝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글을 쓰는 지금도 지금의 삶을 산다. 뭐 하냐는 질문에 대한 답을 꼼꼼하게 글로 쓴다.

호칭도 정리했다. 퇴직자라는 말이 다양하게 부정적이어서 집사람이라 부르기로 했다. 그동안 바깥양반으로 한 시절을 보냈으니, 또 다른 한 시절은 집사람이 되는 것도 괜찮다. 바깥에는 양반이 붙고 집에는 사람이 붙어 빈정이 상하지만, 그렇다고 집양반이라 부르는 것은 입에 붙지 않는다. 그렇게 나는 집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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