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과 이상(異常)

들어가면서

by 김기원

베타버전 퇴직을 끝내면서 연이어 정식 퇴직을 했다. 온전한 집사람이 되었지만, 윤슬 가득한 평온은 어제처럼 오늘도 고요히 흐른다. 반짝이는 윤슬 뒤에는 늘 바람이 있었다. 소리 없이 다가가 부드럽게 어루만지자, 간지러운 듯 가려운 듯 뒤척이는 물결이 윤슬을 만들었다. 고요한 일상을 뒤척이게 만드는 바람이 간간이 분다. 소리 없이 다가와 흔적 없이 사라진 바람의 자리마다 일상이 뒤척이고, 윤슬처럼 빛나는 기억이 어김없이 자리 잡았다. 일상인 듯 아닌 듯한 기억들을 이상(異常)이라 부르려 한다. 집사람을 윤이 나게 만드는 이상들.


처음 불어온 바람은 글쓰기 수업이었다. 글을 잘 쓰고 싶었다. 본격적인 집사람이 되었으니 글을 더 잘 써야 될 것만 같았다. 글쓰기 수업을 신청했다. 소수 정예로 운영되는 글쓰기 수업은 지역에 거주하는 출간 작가가 운영했다. 수업 방식은 단순했다. 주어진 주제들을 가지고 두 시간 동안 짧은 글을 몇 편 쓰고, 첨삭을 받는 방식이다. 총 다섯 번을 진행한 수업에 빠짐없이 다녔다. 글을 더 잘 쓸 수 있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주어진 주제를 가지고 한정된 시간 내에서 글을 쓰는 일도 꽤나 흥미롭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백일장에 나가야 할까? 잠시 고민했다. 남겨진 글들이 이상이 되었다.

또 다른 바람은 영화였다. 한낮에 아무도 없으리라 기대한 영화관에서 홀로 영화를 보는 상상을 했다. 비슷한 상상을 한 사람들이 있어서 상상은 상상에 불과했다. 그래도 쏟아지는 햇빛에 눈을 찌푸리며 영화관을 나서는 일은 집사람이 아니면 쉽지 않다. 독립영화 상영관과 대중영화 상영관이 모두 집에서 그리 멀지 않다. 주로 독립영화 상영관을 찾았다. 절반밖에 안 되는 가벼운 가격이 소득 낮은 집사람의 발길을 이끌었다. 질문을 던지는 것이 영화의 본질이라는 말에 어울리게, 영화관을 나올 때는 생각이란 것을 하고 있었다. 햇살 때문인지 영화 때문인지 미간에 주름이 잡힌다. 그 주름들 사이에서 떨어진 생각들을 기록한 글들이 이상이 되었다.

일상이라는 냇물 속의 담긴 조약돌 같은 바람도 불어왔다. 물속에 있을 때는 선명한 색과 예쁜 모양 때문에 건져내지만, 막상 물 밖에 나온 조약돌은 다른 돌들과 다르지 않다. 집사람이 되어 지내는 동안, 어떤 일들은 지혜의 비유이거나 신의 계시일지도 모른다고 특별하게 여겼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과거의 그저 그런 기억 중에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빼버릴 수는 없다. 빼낸 자리마다 생긴 공백은 골다공증 걸린 뼈처럼 쉽게 부서지는 기억을 만든다. 한때의 치기 어린 기억일지라도 있는 그대로 간직하기로 했다. 냇가에서 주워온 조약돌이 집안 어딘가에 아직도 있는 것처럼. 조약돌을 보면서 그날을 기억하는 것처럼. 기억의 집 속에 있는 조약돌들이 이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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