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0 잃어버린 잠을 찾아서
깊은 잠을 누려본 적이 있다. 저녁에 들면 아침까지 나오지 않던 길고 깊은 잠. 퇴근하면 일단 한숨 자야 한다던 선임의 말에 어리둥절하던 때의 잠. 그러면 밤에 잠 못 든다고 어설픈 칼날을 휘둘러 대던 때의 잠. 지금은 그 칼날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고 온몸으로 맞고 있다.
나이 듦은 밀물처럼 밀려왔다. 아직은 아니라고 별일도 아닌데 호들갑이라고 여기던 때, 나이 듦은 무릎을 점령했다. 앉았다 일어설 때마다 어딘가를 짚어야 했고 나직한 신음이 나왔다. 온돌보다 의자가 더 편해졌다.
그 정도는 누구나 겪는 일이라며 애써 태연하려 했던 때, 나이 듦은 눈을 점령했다. 스마트폰 액정과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고, 팔을 쭉 뻗어야 비로소 시야가 또렷해졌다. 세상과의 거리가 한 팔 길이만큼 멀어졌다.
나이 듦은 어느 순간 잠을 점령했다. 천천히 찬찬히 밀려오는 것 같더니, 어디랄 것도 없이 온몸을 침범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지 드디어 무의식의 세계까지 점령했다. 저녁상을 물리면 견딜 수 없게 졸음이 몰려왔다. 일찍 몰려온 잠은 빠르게 빠져 나갔다. 자정을 갓 넘겼을 뿐인데 이미 나갔다. 게릴라 공격을 감행하듯 짧게 치고 사라졌다. 한번 나간 뒤에는 쉬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정신이 들어왔다. 전등이 켜지듯 달깍 한순간에 훅 밀고 들어왔다. 아직은 아닌데 들어온 것이 미안했는지 혼자 오지 않았다. 걱정과 손을 잡고 떼로 찾아왔다. 일어날 확률이 거의 없는 고민들이 마지막 남은 잠을 살뜰하게 꺼버려다. 뒤척이다 뒤척이다 뒤척이다 이래선 안 되겠다 차라리 일어나야겠다 느끼는 순간, 무슨 농간인지 스르륵 잠이 들기도 했다.
예상할 수 없는 잠은 소중한 일상을 요동치게 했다. 사소한 일에도 불쑥불쑥 화가 났고, 작은 말 한마디에도 오랫동안 서운했다. 별일 아니었다고 여길 일들이, 일어나는 순간에는 말릴 수 없는 격렬한 일이 되었다. 흔들리는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애썼지만, 그럴수록 한없이 추레해져 갔다. 가난할 수도 힘이 없을 수도 있지만, 추레해져 간다는 생각은 스스로를 견디기 힘들게 했다.
집사람이 되었다. 잠이 극적으로 좋아지지는 않았다. 여전히 일찍 나가 버리는 잠과 그 자리를 메우는 걱정들이 자주자주 오갔다. 다른 점이 있다면 마음이 너그러워졌다는 것이다. 못다 한 잠은 낮에라도 만날 수 있다고 위로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잠이 오지 않는다고, 중간에 깬다고 스스로를 다그치지 않았다. 곧 잠이 오겠지. 오는 길이 멀어서 찬찬히 오는 중이겠지. 정히 오지 않는다면 눈이라도 쉬어주자. 기다리는 동안 어려운 책이라도 읽어 볼까?
그래도 불을 끈다. 오늘도 잠을 기다린다. 꺼진 불이 잠을 부르진 않는다. 부른다고 올 잠도 아니다. 오더라도 온 걸음에 다시 달아날지도 모른다. 상관없다. 죽음과도 같은 잠이 올 날도 있겠지. 죽을 때까지 안 온다면 죽은 뒤에라도 오겠지. 괜찮다. 출근이 없는 잠은 한없이 너그럽고 가볍다.
일요일은 한 주의 시작일까? 끝일까? 달력에는 한 주가 일요일로 시작한다. 한 주의 시작은 일요일이다. 그런데 심정적으로는 한 주의 시작은 월요일 아닌가? 그러면 일요일은 한 주의 끝이다. 잠을 자는 동안 날짜가 바뀐다. 그러면 잠은 하루의 끝인가? 아니면 하루의 시작인가? 이런 답이 없어도 되는 생각들 때문에 나간 잠은 돌아올 곳이 없다.
잠이 하루의 시작인지 끝인지는 모르겠지만 잠을 자는 것으로 베타버전 퇴직자였다가 정식버전 퇴직자가 된 하루는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일상의 어딘가에 숨어 있는 이상들이 꿈틀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