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변화 속도에 대한 엉성한 사유
터치폰이 출시되었을 때의 충격은 아직도 선하다. 터치폰을 대면하기 전까지 나에게 휴대폰이란 화면과 버튼으로 구성되어 있어야 지당한 것이었다. 버튼을 꾹꾹 눌러 명령어를 입력하면 화면에 입력값이 정직하게 출력되어야 마땅한 것이었다. 그래서였을까, 터치폰을 대면한 첫 심경은 경외심보다는 이질감에 가까웠다. 터치폰의 첫인상은 반토막난 휴대폰 같았다. 휴대폰이 달랑 화면만으로 구성되어 있다니, 하물며 버튼 대신 화면을 누르는 것이라니.
터치폰만으로도 충분한 충격을 입었던 나였지만 터치폰의 시대는 그마저도 오래 가지 않았다. 그로부터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스마트폰’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이야말로 ‘혁신’의 형상화였다. 어플리케이션을 골라 설치하여 나의 취향에 맞는 휴대폰을 완성할 수 있다는 점이 얼마나 신선했던지.-피쳐폰을 사용하던 당시, 휴대폰에 어떤 게임이 깔려 있는지가 휴대폰 선택의 기준이 되기도 했던 나에게는 특히나 신선한 충격이었다- 어플리케이션은 종류마저 분야를 넘나들었다. 게임, 은행, 메신저까지...
스마트폰이 무척 탐났지만 당시 나는 경제력이 0을 넘어선, 마이너스의 고등학생이었다. 돈을 벌기는커녕 학교 다니며 들숨을 쉬고 날숨을 내뱉는 것만으로 돈을 고갈시키던 시기였다. 부모님께서는 학생인 나에게 그닥 쓸모 없어보이는 그 값비싼 스마트폰을 사주지 않으셨다. 그럼에도 염치없이 스마트폰이 갖고 싶었던 나는 부모님께 질문을 던졌다. “스마트폰도 공짜폰이 되는 날이 있을까?” 부모님은 어림도 없는 소리라고 하셨다. 스마트폰은 제조 비용이 비싸기 때문에 절대 무료로 보급될 일이 없을 것이라 확신하셨다.
하지만 스마트폰은 빠른 속도로 대중화되었다. 더이상 아무도 스마트폰을 혁신적 아이템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지금 아무 대리점이나 들어가서 공짜 스마트폰이 있는지 질문한다면, 99퍼센트의 확률로 '있다'는 답을 들을 것이다. 혁신은 혁신을 부른다. 늘 정상에 섰다고 자신하지만 정상의 최종점은 거듭하여 갱신된다. 스마트폰의 혁명적인 편의성에 감탄을 남발하던 그 시절, 인류 문명 발전의 혜택 정상에 오른 것만 같았다. 여기서 더 기술이 발전하는 게 가능할까, 기술의 결정에 놓인 인류가 바로 내가 아닐까.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그러나 눈뭉치를 굴릴수록 눈뭉치의 크기가 불어나는 속도에 가속도가 붙듯이 과학과 기술은 상상도 어려운 속도로 급격히 발달해나가고 있다.
손에 넣고 다니는 휴대폰마저 피쳐폰에서 터치폰으로, 그 뒤를 이어 스마트폰으로 발달해왔다. 휴대폰의 발달 속도처럼 세상은 빠른 속도로 변해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AI, 자율주행 자동차...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허상 같던 기술들은 현실로 도래했다. 인류의 삶의 편의에 대한 효용의 역치는 포물선을 그리며 높아질 것이다. 끝없이 수직으로 솟는듯한 그 포물선을 견지하고 있자면 미래의 삶이 궁금해지기도 하지만, 자꾸만 세상이 빨리 변해갈 것만 같아 조급해진다.
요즘은 세상이 변하는 속도가 조금은 느려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에 추를 매달 초능력이 있다면 기꺼이 그리 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조금은 촌스러운 거리, 사람 냄새로 텁텁해진 카페, 엉성한 꽃들이 사랑스러운 공원 같은 삶의 터가 빨리 허물어질 것만 같아 섭섭해진다. 아직까지는, 이 삶의 모양새를 느긋하게 음미하고 싶다.
여기까지 썼지만 도무지 내가 무어라고 적어 내려갔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그래도 글의 전개가 기술의 발달의 모양새와 일맥상통하는 것 같아서 영 언짢지만은 않다. 글의 전개가 느렸다가, 점점 빨라지는 모습. 그리고 조금은 뒤죽박죽한 모양새가 꼭 이 글의 주제를 대변하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