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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z교사 나른이 Nov 28. 2024

추억, 낭만, 그리고 눈

눈에는 낭만이 서려있다

 이번 주에 첫눈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문득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첫눈', 존재만으로 얼마나 로맨틱한 단어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린 시절에는 눈을 좋아하지만 어른이 되고 나서 눈에 대한 설렘을 잊고, 특히나 운전을 시작하고 나면 눈 오는 날씨가 얄궂게 다가오기까지 한다고 한다. 허나 나는 아직 철이 덜 든 탓인지, 어린 시절의 낭만을 몸이 기억하고 있는 건지, 아님 아직까지도 운전을 하지 않아서인지. 여전히 나는 눈을 사랑하고, 고대하며 눈이 가져다주는 은밀한 낭만스러운 분위기를 만끽한다. 눈 오는 날에 특별한 이벤트가 있는 것도 아닌데도 이렇게 기대되는 마음을 누르기 힘든 걸 보면 눈에는 가슴을 뛰게 아는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존재함이 분명하다.

 

추억 하나, '일어나서 창문 좀 봐! 눈 온다!' 아침에 눈 뜨고 일어나기 어려워하던 어린 시절의 나는 엄마의 한 마디를 듣고 벌떡 일어났다. 아침잠이 많아 아침마다 침대 밖으로 나오는데 고군분투하던 나에게 '눈'은 마법의 단어였다. 세포 하나하나에 온기를 전달하던 전기장판과 이불속에 갇혀 뜨끈하게 데워진 공기를 뒤로 한 채, 한기가 도는 마룻바닥에 발을 디뎠다. 한 걸음, 한 걸음 디디며 창가로 향하다가 창 밖의 하얗게 변한 세상을 마주하고 탄성을 질렀다. 어렸던 나의 두 눈은, 하얀 세상을 가득 담은 채 경이로 가득 찼다. 전날까지만 해도 형형 색색 각자의 색을 드러내던 건물들은 포근한 눈에 쌓여 온통 하얗게 되었다. 뾰족한 각으로 날을 세우던 큼지막한 간판들은 보드라운 눈에 뒤덮여 찔려도 아픔 대신 포근함을 느낄 정도로 뭉툭하고 순한 각이 되었다. 세상이 커다란 하얀 이불로 덮인 것 같은 포근함을 느꼈고, 나마저 그 커다란 이불에 쌓여 보호받는 것 같았다. 눈 내리는 날은 등굣길마저 신이 났다. 아무런 흔적도 없는 하얗고 순수한 눈이 있는 곳으로 의도적으로 다가가 가장 먼저 발자국을 낸다. 마치 눈에 '내 것'이라는 흔적을 남기듯, 눈을 정복하듯 실컷 발자국을 만들어냈다. 뽀득뽀득- 발자국이 만들어지는 소리마저 경쾌했다. 장갑도 안 낀 손으로 자동차 위에 쌓인 눈을 쓸어 모으고, 손으로 꼭꼭 뭉쳤다. 손이 차갑고 빨갛게 되는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추억 둘, 유치원 시절 동생의 생일에 눈이 왕창 내렸다. 동생은 하늘이 생일 선물을 준 것 같다고 외치며 좌우로 앞뒤로 신이 나서 폴짝거렸다. 생일날 눈을 떴는데, 창밖을 내다보니 온통 포근하고 조용한 눈으로 뒤덮여 있다는 것, 얼마나 낭만적인가. 심지어 눈이 꽤나 쌓여 눈사람을 만들기에도, 눈싸움을 하기에도 부족하지 않을 양이었다. 그날은 일요일이었고, 여느 때처럼 우리 가족은 교회로 향해야만 했다. 그런데 아빠가 눈이 너무 많이 내려, 오늘은 차로 태워다 주실 수 없다는 폭탄선언을 하셨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오히려 좋았다. 뽀얀 눈을 뽀득뽀득 밟아대며 걸어서 교회로 가는 것도 나름의 재미가 있을 것 같았다. 눈싸움도 하고, 눈을 손으로 조물딱거리며 신나게, 그리고 무사히 교회에 도착했다. 문제는 그다음에 있었다. 교회에 머물러 있는 동안 눈은 더 내렸고, 눈은 더욱더 쌓였다. 걸어가기 어려울 정도로 눈이 쌓였다. 나와 동생은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외롭고 고된 선구자가 되어 무릎만큼 쌓인 눈을 푸욱 푸욱 밟으며 집에 왔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경쾌한 '뽀득'이 아닌 '푸우우욱' 같은 깊고 어두운 소리가 났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눈이 달라붙은 축축한 바지를 벗어던지고, 푹 젖은 양말을 벗으니, 빨갛게 얼어붙어있던 가여운 발이 드러났다. 그래도 우린 어렸고, 낙천적이었으며, 무엇보다 회복력이 빨랐다. 볼멘소리 하나 없이 샤워기로 따뜻한 물을 틀어 발을 녹인 후 전기장판에 들어가 텔레비전을 보며 귤을 까먹고 철없이 뒹굴거렸다.


 추억 셋, 눈이 고요하고 평화롭게 내리던 한 겨울날, 남자친구와 데이트를 했다. 추위를 많이 타는 나는 내 키만큼이나 긴 롱패딩에 몸을 구겨 넣고, 패딩에 달린 모자까지 푹 눌러쓴 채였다. 꼭 잡은 두 손은 남자친구의 코트 주머니에 넣은 채로. 우리의 코 끝은 빨갛게 얼어 있었다. 꼭 루돌프 같아, 문득 빨간 코마저 겨울스럽다는 생각이 스쳤다. 추위 속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으면서도 쏟아지는 눈의 아름다움에 취해 조금은 아련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입술 사이로 빠져나오는 하얀 김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사각사각, 네 개의 발자국을 찍어대며 우리는 가지런히 걸었다. 문득 고개를 돌려 남자친구를 바라보았다. 남자친구와 내 얼굴, 그 좁은 틈 사이를 비집고 계속해서 눈은 내렸고, 흩뿌리는 눈조각은 우리의 낭만적인 분위기를 고양시키기에 충분했다. 남자친구의 머리카락에 얹혀 있는 눈을 손끝으로 툭툭 털어내자 남자친구는, 내년에는 무조건 차를 사겠다고 말했다. '왜? 이런 날에 같이 걷는 것도 분위기 있고 좋은데.' 눈 오는 어느 날, 철없는 한 쌍의 연인은 그렇게 가지런한 발자국만 남기고 사라졌다.


 올해도 어김없이 눈은 찾아온다. 고결하고 영원한 기약처럼 겨울마다 사르르 찾아와 수많은 어린아이들, 그리고 낭만을 품고 사는 사람들의 심금을 어지럽힌다. 겨울의 시작을 은밀하게 알리듯이. 이토록 어지러운 세상도 포근히 덮어 품어 내리라 맹세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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