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과의 권태, 이별, 그리고 재회
글을 오랫동안 짝사랑해 왔다. 글은 나에게 새로운 차원의 아름다움을 맛보게 했다. 때로는 한 번도 상상하지 못한 세계에 발을 딛도록 땅을 내어 주었다. 여리면서도 단단한, 조신하면서도 우렁찬 변화무쌍한 글의 매력에 나는 휘청댔다. 때로는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숨이 가빠졌다. 자음과 모음이 짝을 지어 글자가 되고, 글자를 짜내어 단어를 만들고, 단어를 엮어내 문장을 만들고, 문장을 이어 붙여 글을 만들어내고. 예상치 못했던 단어들 간의 결합. 그리고 그 결합은 가슴속에 잔물결을 이루어냈다. 띄어쓰기와 맞춤법으로 짜여진 깐깐함. 그 와중에도 시적 허용이라는 인간정인 여지를 남겨두어 문학에 온전히 스며들도록 허락하는 너그러움. 글은 시각으로 시작되어 온 감각을 타고 흐른다. 온 신경을 타고 몸의 구석구석 파장을 일으켰다.
글의 정제된 아찔함을 오랫동안 글을 사모해 왔다. 글로써 삶을 성찰하며, 사랑하는 이에게 마음을 전하며, 자음과 모음을 조합해 밤하늘의 별만큼 다양하고 미묘한 뜻을 만들어 내어 왔다. 삶의 지혜가 필요할 때, 위로가 필요할 때, 삭막하고 건조한 마음에 한 방울의 물을 떨어뜨리고 싶을 때 스스로에게 가장 적합해 보이는 종류의 글을 처방했고, 몇 시간이고 살을 부비며 친밀하게 지냈다.
그러나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중고등학생 때즈음 글을 저버리고 멀리 도망간 적이 있다. 중고등학생 시절, 교과서에서 주입해 대는 글들은 모조리 교훈을 함축하고 있었다. 학교에서 제시하는 추천도서 목록-바람직하며 읽을만한 글의 표본을 제시하는 것만 같았던-의 도서들은 교훈적이거나 학구적이었다. 글은 모름지기 유익해야 하고, 인간은 글을 읽음으로써 생산적이고 건전한 자신에 대한 고양을 일궈 내야 한다는 일종의 강요 같았다. 교훈과 유익으로만 이루어진 글은 무거운 추가 되어 몸을 가라앉혔다. 숨이 막혔다.
본디 나에게 있어, 글쓰기의 성정은 일종의 유희이자, 삶을 각인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에 기인한 행위였다. 갈대밭이 바람에 휘날리듯 그저 저항 없이 심장이 이끄는 대로단어와 문장을 써 내려가고, 글을 엮어내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다 써 내려가 마침표까지 달아둔 글에 구질구질 어쭙잖은 교훈 한 두 마디씩 덧붙이곤 했다. 앞으로는 이래야겠다, 이런 것을 배웠다, 이런 사람이 되어야겠다 같이 교훈적이거나 유익한 한 두 마디를 붙여 글을 진부하게 손대어 버렸다. 무언의 유익을 이끌어내는 글을 써 내려야만 사회에서 규정한 가치 있는 글이 된 것만 같았다. 글에서 교훈과 유익을 찾으려는 행위와 모범적인 글을 쓰려는 강박은 글과 나 사이를 점점 멀어지게 했다.
어느 날, 긴 권태 끝에 글에게 이별을 고했다. 너를 사랑하지 않겠노라, 앞으로 필요로 의해서만 찾아가겠노라. 그 이후 나는 글을 철저하게 딱딱한 태도로 대했다. 실용의 목적으로만 글을 찾았다. 국어 지문을 읽으며 글쓴이의 의도나 글에 드러난 공감각적 심상, 비유 같은 것들을 기계적으로 분석할 때. 레포트를 쓸 때 보조 자료를 검색해 낼 때, 보고서를 써 내려갈 때. 글도 딱딱하게 변해버린 내게 언제부턴가 마음을 닫아서, 더 이상 새로운 세계로 통하는 길을 엿보여주지 않았다. 내 감각에 살포시 올라앉아 자음과 모음의 절묘한 기교로 더 이상 간질이지 않았다. 우리 사이에는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았고, 서로에 대한 고찰과 사유는 막을 내렸다.
십 년이면 강산이 바뀐다는 속담마저 무력해지는 현대사회이다. 기술과 과학의 혁신이 수없이 거듭되고, 요란한 현대 문물들이 등장하고 전시되며 소비된다. 출처 모를 유희거리가 등장하고 사람들을 유혹하고 혼을 빼놓는다. 길고 어두웠던 터널 같았던 학창 시절을 마무리하고 나서 권태 끝에 결국엔 글을 잊고 말았다. 글을 만나러 달려갈 시간이 없었다는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지 않겠다. 요란했던 첫사랑을 건너, 졸업과 취직 준비라는 골을 타며 가속화되는 삶의 속도에 발맞추느라 벅찬 까닭이기도 했으나, 그럼에도 쉬는 날에는 관성처럼 어김없이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집어 들었으니. 시끄럽고 알록달록한 유희거리들에 눈멀어 글의 단아하고 잔잔한 아름다움을 망각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나는 돌고 돌아 글과 엉겁결에 재회하게 되었다. 일에 치이고, 누구 하나 내 편이 아닌 것 같아 더욱 서러웠던 어느 날. 뜬금없게도 주변 사람들에게 메신저 대신 대신 편지를 보내고 싶어졌다. 메신저보다 느린 속도이지만 정성껏 구워낸 빵처럼 따끈한 마음과 안부를 주고받으며, 혀끝으로 찬찬히 음미하며 외로움을 씻어내고 싶었다. 편지에는 묘한 힘이 있어, 편지에 수 놓인 글자는 쓰는 이와 읽는 이의 마음을 간질이고 이들을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해 낸다. 편지를 쓰며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떠올려 내고, 사랑을 한 땀 한 땀 손으로 수놓으며 우리가 주고받은 사랑을 되새김질한다. 빳빳한 편지지를 꺼내고, 차분하게 앉아 펜을 들었다. 사랑과 다정함을 섬세하게 수놓아볼까 다짐하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편지에 수놓을 단어들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긴 권태를 넘어 글과 이별했던 나에게 글의 흔적은 옅어진 지 오래였고, 글의 기교나 영감 따위 남아 있을 리 없었다. 그동안 읽지도, 쓰지도 않았던 나의 두레에 퍼 올릴 물이 잔존하지 않았다.
마중물이 필요해. 집 앞의 작은 도서관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직설적이고 단편적인 소통, 생존에 필요한 용어로만 가득 차 있는 뇌에 선선한 봄바람을 불어넣기 위해 도서관을 처방해야만 했다. 실용에서 조금은 벗어나있는 현학적 단어들, 함축적인 문장들이 건네는 온기가 폐포와 혈관을 타고 몸 전체를 뎁혀낼 수 있도록. 어떤 책을 읽겠다는 작정 없이 빽빽한 책장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다. 베스트셀러 목록, 권장 도서 목록에서 읽을 책을 고르는 것은 이미 오래전 질렸다. 사회가 유익하며,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지정해 주는 책을 순순히 읽고 싶지 않았다. 온전히 내 직감만으로 책을 골라보고 싶었다. 제목을 살피고, 표지의 그림과 질감을 느껴보고, 머리말을 살짝 맛보고.. 오로지 감각으로만 읽고 싶은 책들을 몇 권 뽑아내었다.
아, 내가 글을 오래도록 홀로 오해했다는 사실을 마침내 깨달았다. 중고등학생 시절 만났던 권장도서들은 세상의 여러 글 중 극히 일부였구나. 글은 결코 교훈이나 올곧음을 강요하는 교사만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마음으로 재회한 글은, 나를 꾸짖거나 가르치려 들지 않았다. 사회의 바람직한 구성원으로 살아가야 함을 강요하지도 않았다. 선과 악, 미와 같은 세상의 다채로운 양상들을 자음과 모음으로써 그려냈으며, 때로는 오히려 어떤 영상물보다 야하기도 잔인하기도 했다. 글의 본성은 인간을 올바른 길로 이끄는 스승뿐이 아닌, 인간과 인간 사이에 약속된 획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펼치는 무대이자, 누군가의 삶에 대한 회고이자 희망, 세상에 얽히고설켜있는 온갖 가치들과 양상들의 집합체. 인류의 총합에 대한 기념비였던 것이었다.
잔잔한 바다에 거대한 파도처럼 그리움이 밀려왔다. 글을 발판 삼아 내다보던 다른 차원의 세계. 고된 하루를 보내고 글을 읽으며 단 하나의 단어에 꽂혀 펑펑 울어버리던 날. 존경하던 선생님의 책상에 수줍게 놓은 조금은 꾸깃한 편지. 글로써 엮어내던 조금은 느리고 수수했던 시간들. 이로써 다시 글에 대한 사모와 과감한 애정표현은 재개되었다. 그리고 글에 대한 사모는 죽는 날까지 이어가, 평생을 읽고 쓰는 애서가가 되고자 한다.
아직 자식이 없고, 훗날에 자식이 생길는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미래의 자식이 책을 읽게 된다면, 교훈적인 추천도서만을 건네지 않으리라. 때로는 앞섶을 풀어헤친듯한 꾸밈없는 글, 세상의 온갖 더러움과 추를 폭로하는 글을 건네겠다. 글은 너에게 정답만을 요구하지 않는단다, 글은 늘 단아하고 깔끔하지는 않단다. 그러나 무궁무진한 세계로 너를 안내할 것이며, 가끔 네가 힘들 때 곁에서 묵묵히 너를 위로해 주는 존재가 되리라, 알려줄 것이다. 그가 도덕적 가치를 한껏 드러내며 글을 억지스럽게 바람직한 양상으로 곧추 세우려 하는 날에는, 글에 조금 더 솔직함을 담아보기를 권하겠다. 억지스러운 교훈 따위 끼워 넣지 않아도 훌륭한 글이 될 수 있음을 속삭여 주리라. 교훈과 도덕, 선이 아닌 진정한 글을 즐길 수 있도록 이끌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