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에 대한 하이퍼 리얼리티와 가톨릭 신앙
2019년, 너무 마음에 드는 영화를 또 하나 발견하였다. 일명 ‘결혼 이야기’. 이 영화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져버렸다.
아담 드라이버의 상처 받은 어른 남자의 연기와(맴찢) 결혼이 깨지면서(우리는 남녀관계에 대해 깨진다는 표현을 쓴다. 이미 깨진 후에는 붙여보려 해도 붙지 않는 관계이기에...) 서로의 마음에 깊게 파인 그리고 아이의 마음에 파인 생채기, 결혼 이야기는 상처 이야기이다.
상처 이야기인 이유는 부부가 결혼하여 하나의 가정을 이룰 때와 부부가 서로 다른 속도로 방향으로 성장할 때, 즉 나는 성장하였는데 상대방은 변하지 않았을 때 그 간극을 메꾸기 어려워 결국 갈라서게 되면서 상흔이 발생한다. 갈라서면서 더 이상 ‘우리’에 대한 희망은 사라지고, 서로의 성장을 도모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울 수 있는 관계는 소멸된다. 그리고 우리가 한 몸이었을 때 나눈 사랑의 언어로 탄생한 아이의 마음에도 깊이 생채기가 난다. 남주 여주의 실제와 같은 혼신을 다하는 연기, 둘이 소리 높여 언쟁을 벌일 때 그 상처 받은 두 영혼은 마치 내 얘기처럼 생생하게 들린다.
나는 결혼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처음에는 누구나 행복한 결혼을 꿈꾼다. 부족한 인간인 나와 똑같은 상처를 지닌 부족한 또 다른 인간이 만나 이루는 공동체 생활인 결혼. 결혼이란 어느 영서 서적에서 읽었는데 서로의 십자가를 지고 가기로 약속하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결혼할 때 이런 생각을 했는가? 전혀 아니다. 그저 행복한 생활만을 꿈꿨었다. 그렇다면 스스로 질문을 해보자. 지금의 나는 내 남편의 혹은 내 아내의 십자가를 지고 갈 자신이 있는가?
또 한 켠에서는 결혼이란 서로 사랑해서 하는 것이 아닌 서로 평생 사랑하기로 약속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어마어마한 약속을 우리는 지킬 수 있는가? 지킬 수 있는 성질의 것인가?
노아 바움벡은 우리를 그 상처의 현장으로, 여기서 여주(스칼렛 요한슨) 개인의 자아는 성장하고 독립했지만 가정은 깨어진 그 현장으로 초대한다. 감독은 우리에게 윤리적인 잣대를 들이대진 않는다. 결혼은 상처 난 채로 유지해야 하는 성질의 것이라거나, 아이를 위해 가정의 틀을 깨지 않아야 한다는 그런 성질의 메시지를 주지는 않는다. 다만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 결혼 이야기의 아픈 면을 생생하게 극사실적으로 그려준다. 이 영화는 슬퍼서 아름답다. 우리 인간의 모습을, 그 혼란스러움을, 그 어쩔 수 없음을 반영하고 있어 심금을 울린다. 주인공들의 슬픔은 마치 우리 한 명 한 명의 절규와 닮아있다. 그리고 우리에게 생각할 여운을 남겨준다.
신자로서의 단상
나는 천주교 신자이다. 천주교에서는 혼인성사란 하느님 앞에서의 계약이며 따라서 인간끼리 맺은 인간관계, 자발적 의지에 의해서 끊을 수 있는 관계가 아니라고 믿는다. 혼인한 가톨릭 신자는 따라서 매일 밥을 먹듯 매일 부부 사이에 주님께서 함께 해주시기를 기도로 초대해야 한다. 그래야만 인간적으로 흔들릴 수 있고, 어려울 수 있는 이 관계를 영위할 영적인 자양분을 얻을 수 있다. 이 영화를 보며 결혼생활 내내 앞으로 주님께 끊임없이 의탁하리라고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