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치유
며칠 전 (해외에선) 어렵사리 구한 영화 페인 앤 글로리를 보았다. 어느 영화감독 살바도르(안토니오 반데라스) 고통과 영광에 대하여. 살바도르는 영광스러운 나날이 있었지만, 현재는 작품도 하지 않고 영광의 그늘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는 어느 날 몇십 년 전 의절하고 지낸 영화 ‘맛’의 남주를 찾아간다. 그 영화배우 알베르토는 처음에 살바도르를 박대한다. 감독이 과거에 그에게 모욕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알베르토는 집에서 약을 한다. 유럽 집에서 대마초 피는 일상적인 모습을 기대했었는데, 대마초가 아닌 헤로인이었다. 살바도르는 헤로인을 피는 알베르토에게 동참하고, 자신도 피워보겠다고 한다. 둘은 헤로인을 피운다.
어느 날 알베르토가 살바도르의 집에 찾아온다. 그는 살바도르가 잠이 든 사이, 그의 컴퓨터 바탕화면에 깔려 있는 시나리오 하나를 발견하고 읽어 내려간다. 그 시나리오는 바로 감독 살바도르 자신의 이야기이다.
알베르토는 이 시나리오를 자신에게 달라고 한다. 그리고 1인극 연극에 올린다. 우연히 이 곳을 지나가던 중년의 남자 한 명이, 이 연극을 관람하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린다.
이 남자는 바로 살바도르의 옛 연인이다. 그렇다(감독 자신의 자전적 얘기가 아니라 부인했던가. 한 편에서는 맞다고 했다. 동성애 이야기가 나온다.) 헤로인에 중독되었다가, 남미로 떠나버린 그. 이제는 결혼해서 아이도 있다는 그 사람.
살바도르는 자신의 옛 애인과 재회한 후 헤어지지만 다시 자신의 삶을 하나씩 살아갈 의지를 북돋는다. 그동안 방치해왔던 자신의 육체적 고통. 질병을 치유하기 위해 의사를 찾아간다.
화려한 영상미. 화려한 색감. 알모도바르 감독의 익숙함을 이 영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그가 즐겨 찾는 배우 페넬로페 크루즈의 연기도 볼 수 있다. 특히, 영화감독의 어린 시절, 그가 살았던 동굴 같은 집에서의 이미지들이 아름답다. 흰 회벽에 붙여진 알록달록한 타일들. 뻥 뚫린 천장에서 내려오는 빛. 그 안에 앉아서 책을 읽는 살바도르의 어린 시절 모습. 장성한 영화감독의 부엌에서 찾아볼 수 있는 원색들. 수영장에 영화감독이 잠긴 채 눈을 감고 있는 물속의 첫 장면. 그리고 주인공이 앓고 있는 질병들을 화려한 그래픽으로 보여주는 장면들.
그리고 약방의 감초 같은 나이든 살바도르와 그 엄마가 나눈 대화 씬. 방심하고 있다 눈물이 흐를 수 있음 주의. 나이든 혼자된 살바도르의 엄마는(매우 귀여운 할머니가 되어있다) 성인이 된 살바도르에게 같이 살자했지만 살바도르가 냉정하게 거절했다며 그 때 상처받았다고 투정하듯 다 큰 아들에게 털어놓는다. 이런 솔직한 나이든 엄마가 밉지않다. 세월이 흘러 내가 너한테 이런걸 바랬었다 그 때 충족되지 않아 상처받았다는 그런 말.
그렇지만 이 영화는 무엇보다 기억의 치유이다. 꽁꽁 봉해놓고 들여다보고 싶지 않아 한편에 처박아 둔 상처의 기억. 어린 시절의 기억들. 감독은 이 영화에서 그 작업을 하는 주인공을 보여준다. 비로소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나의 글로 표현할 때, 그 글이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연극), 그 반응으로 인해 과거와 조우할 때(옛 연인과의 만남) 그제야 감독은 자신의 과거와 화해하고 자신의 상처를 마주 보고 자신의 인생의 고삐를 다잡는다.
우리 모두 이런 작업이 필요하지 않은가? 우리의 상처를 꺼내놓고, 상처를 치유하는 작업.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필수적인 이 작업. 우리 누구나 바로 지금 시작할 수 있다. 이 과정을 통해야지만 과거에 붙잡히지 않은 채 지금의 삶에 온전히 올인할 수 있다. 지금 내가 치유해야 할 기억은 어떤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