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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링클레이터의 ‘어디 갔어 버나뎃’

집 나간 나 자신 어디 갔니?

by 미미
어디갔어 버나뎃 영화 속 장면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이름만 들었을 때 생소하지만 사실은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영화들이 수두룩하다. 비포 선라이즈, 비포 선셋, 비포 미드나잇, 보이후드 감독이라고 하면 다들 알듯.


이 영화는 포스터, 제목을 보아 알다시피 그다지 평범하다 할 수 없는 인디 느낌을 팍팍 풍겨주는 그런 영화이다. 게다가 케이트 블란쳇 주연이라니. 지적이고 우아한 느낌의 배우 케이트 블란쳇. 그러면서도 어딘가 강인하며 중성적인 매력을 지닌 배우. 가볍지 않은 역할에 잘 어울리는 그런 외향을 지녔다.


버나뎃은 한 때 칭송받는 천재적인 건축가였지만 (천재 건축가상을 수상) 알지 못한 채 이웃집 티브이 진행자에게 건축물을 팔게된다. 그 이웃집 남자는 건축물을 사자마자 의도적으로 허물어버린다. 그녀는 이 사건 이후 건축에 손을 놓게 되고, 남편 직장을 따라 시애틀로 가족과 이주하여 지금은 한적한 동네에 자리 잡고 사는 십 대 소녀의 엄마이자 마이크로소프트에 다니는 개발자(잘 나가는 한 남자)의 아내이다. 그녀의 일상은 미국식 단독주택에서 끊임없이 고장난 무언가를 수리하고, 비서 역할을 하는 누군가(바로 AI)와 말을 주고받는다. 그렇지만 일상생활에서는 누구보다도 남과의 교류를 피하고 싶어하는 존재이다.


아이 학교에 데려갈 때 학부모들을 만나고 싶지 않아 피해 다니고, 집에서는 이웃집 학부모이자 기가 센 이웃 여자 사람 오드리와 최대한 마주치고 싶지 않아 될 수 있는 한 그녀를 피한다. 이렇게 피해 다니며 인생을 산다. 잠이 오지 않아 약국에서 약을 타가는 모습들도 그려진다. 그렇게 살고 있는 그녀에게 딸 비는 원하던 기숙학교 입학허가를 받은 대가로 가족 남극 여행을 제안한다. 처음엔 얼토당토 안 하게 느껴졌지만 버나뎃의 인생에서 주요 기점으로 작용하게 되는 이 남극.


버나뎃은 이미 너무 잘 나가고 너무 바쁜 남편 엘진과도 소원한 사이이다. 그 사이에 이간질하는 이가 있으니 바로 엘진의 회사에서 비서로 일하는 수린이라는 여자이다. 그녀는 버나뎃의 딸 비 학교 학부모이기도 하고, 이웃집 여자 오드리와도 표면적으로는 친한 학부모이다. 아 여기서 자식이 있는 누구나 느낄 수 있는 학부모들 사이의 기류... 새 학년 새 학기가 혹은 새 동네로 이사 가면 느낄 수 있는 불편함. 그 그룹에 끼기 위해서 자신을 구겨 넣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그냥 버나뎃처럼 아예 아웃캐스트로 자신이 스따(스스로 따)시키는 이도 있다. 버나뎃이 어떤 심정일지 백분 이해할 수 있다.


버나뎃이 최근 학교 앞에서 비를 데리러가다 오드리를 칠뻔한 사건, 그리고 이웃집 오드리와의 다툼 등을 알게 된 엘진은 버나뎃을 이태까지 방치하다시피 하다 결국 정신과 의사를 고용한다. 그리고 버나뎃과 상의도 없이 정신과 의사를 집으로 데려오고 버나뎃을 치료받게 하려 한다. 버나뎃은 화장실 창문을 통해 도망치고...


그녀가 유일하게 소통하는 셋: 개인 비서 역할 AI, 딸 비, 그리고 그녀의 멘토이자 교수 폴 젤리넥


이 영화의 현자이자 교수 폴은 그녀를 찾아와 버나뎃의 근황을 듣더니 딱 한 가지 처방전을 내린다.


“People like you must create. If you don’t create, Bernadette, you will become a menace to society.”


버나뎃, 당신 같은 사람은 창작을 해야만 해. 창작하지 않으면, 사회에 위협적인 존재가 될 수 있어.

그렇다. 버나뎃은 여태까지 본인의 이름, 본인이라는 자아, 본인의 영혼을 모두 건축에 쏟아부었는데 하루아침에 자신의 모든 것이 파괴되는 트라우마를 경험하였다. 그리고 네 번의 유산 이후 어렵게 얻은 딸에게 모든 것을 쏟아붓느라 아내와 아이의 엄마로만 산 인생. 그러면서 ‘내’가 죽는 경험을 한 여자이다. 버나뎃은 그렇기에 그 동네의 다른 여자들과 다르다. 동네의 이웃집 여자인 오드리는 자신의 아이를 자랑거리로 내세우면서 겉으로는 멀쩡한 삶을 영위하는 듯하다. 그렇게 포장해야만 그녀의 초라한 자아가 살 수 있기에...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알게 되지만 실제 상황은 정반대이다.


반면 버나뎃은 창조의 에너지를 갖고 있는 여자이다. 우리 모두 그렇지 아니한가?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우리는 아버지를 닮아 그 창조사업에 동참하게 되어있다. 그리고 우리의 창조 에너지는 아이를 낳는 직접적인 창조사업에만 국한될 수는 없다. 창조 에너지는 분출해야만 하는 것이다. 내 영혼을 쏟아부어하는 창작의 활동, 그래야만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영을 강하게 타고나고 가꿔오고 그러한 정체성으로 살아온 예술가는 창조성을 발휘하지 못하는 순간 그의 내면은 이미 죽은 것과 다름없다. 밖으로 뻗어나가지 못하고 안으로 뻗어나가 그를 잠식하고 끝내 자기 자신을 죽이는 에너지 같은 것.


버나뎃은 그렇게 자신을 병자 취급한 엘진에게서 탈출하고, 끊어놓았던 남극행 티켓으로 남극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어느 여성을 만나 남극기지를 건설하는 이야기에 대해 듣고 그동안 잠들어 있었던 그녀의 건축 본능이 크게 고개를 다시든다. 그녀는 우여곡절 끝에 그곳에서 창의성을 발휘하여 기지를 건축하는 업무를 맡게 되고, 엘진과 비가 그녀를 찾아오면서 세 가족은 서로를 찾고, 이해하고, 화해하게 된다. 서로를 찾아가는 노력을 기울일 때에 비로소 서로를 이해할 수 있고, 서로 간의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다.


우리의 존재를 온전히 이해받았을 때는 언제인가? 우리는 어떠한 존재인가? 엄마로, 아내로 살아가면서 잊고 산, 거추장스러워서 마음 저 켠에 밀어 넣어버린 열정. 그 창조의 에너지. 이 에너지가 발산되지 않으면 죽어버릴 것 같은 그 느낌. 버나뎃의 인생이 계속 힘들 수밖에 없던 이유는 그녀 자신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부인한 채 다른 역할들의 모습만으로 겨우 삶을 살아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역할만을 담당하라고 만들어진 그런 하찮은 존재가 아니다. 누구누구의 엄마, 아내, 딸의 역할을 하려고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 우리의 역할을 내려놓고도 진정한 우리 자신으로서 존재할 권리가 있다. 우리의 진정한 모습, 어디 있는가?


가톨릭 신자로서 버나뎃은 낯선 이름이 아니다. 더 정확하게는 프랑스 이름이니까 기왕이면 프랑스 발음으로 성녀 베르나데뜨. 프랑스 루르드에서 성모님이 발현하신 기적의 사건 속 주인공. 영화 속 주인공 버나뎃은 건축가 커리어 초반에 ‘성녀 버나뎃’으로 추대받을 정도로 건축계의 떠오르는 샛별이었다. 그렇지만 세상에서 숨어버린 버나뎃에게 이제 필요한 건 또 다른 기적이다. 자신을 되찾는 과정, 자기 자신과 그리고 그를 둘러싼 이들과의 소통의 과정을 통한 치유. 버나뎃처럼 우리에게도 기적의 사건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우리 내면의 자신과 소통해야 한다. 자신이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이 나를 살리고 죽이는지를 알아내는 자신과의 소통이라는 관문을 통해야만 자신의 창조 에너지를 건드릴 수 있는 문턱에 다다를 수 있으리라. 그것이 건축이든 글쓰기든 그림이든 음악이든... 무언가를 창조하는 경험. 그럴 때에 우리는 잃었던 우리 자신을 되찾고, 기적이 일어나는 경험을 할 수 있으리라. 그럼 그 동안 수 많은 사람들이 병명을 모른 채 앓아왔을 병명은 다름아닌 ‘어디갔어?’병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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