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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드로 알모도바르의 ‘그녀에게’

Hable con ella (쉿! 그녀에게 말을 거세요)

by 미미



https://youtu.be/7fl8tyEIXXI

‘그녀에게’ 트레일러


오프닝

영화 도입부는 흡사 공연장에서 연극이 시작하듯 막이 걷히고, 관객석에 앉아 무용극을 관람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피나 바우쉬의 카페 뮐러로 화려하게 오프닝을 시작한다.

(*이 작품 설명은 다른 글에 있습니다)

공연장면을 보고 마르코는 이내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아직 서로 모르는 사이인 베니뇨는 우연히 그 옆에 앉아 마르코의 그런 모습을 목격한다.


줄거리

베니뇨는 무용 교습소 맞은편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다. 그곳에서 무용 교습소를 내려다본다. 정확히는 한 무용수, 알리샤를 응시한다. 하루는 그녀를 미행하고, 그녀가 정신과 의사 딸이라는 걸 알아낸다. 그리고 그 의사에게 가서 상담을 받는다. 그렇게 관객이 듣게 되는 그의 이야기. 그는 15년 동안 엄마를 간호하였다고 한다. 엄마의 수발을 다 들은 그. 그는 통신으로 마사지, 화장 기술까지 다 배웠다고 한다. 그런 그의 이야기를 들은 의사는 그보고 매우 특이한 성장과정을 거쳤다고 하는데, 베니뇨는 대수롭지 않은 듯 아니라고 한다. 베니뇨는 병원 간호사이다.


마르코는 반면 기자이다. 그는 티브이에서 리디야라는 여자 투우사가 토크쇼에 나온 걸 보고 그녀에 대해 특집으로 다루기로 하고 찾아간다. 그리고 리디아를 바에서 만난다. 그녀를 집에 데려다주게 된다. 마르코가 투우사라는 직업이 아닌 자신의 사생활에 초점을 맞춰 기사로 다루려는 걸 알고 화를 내며 집에 들어간다. 하지만 이내 소리를 지르고 뛰쳐나온다. 그 이유는 바로 뱀 때문이다. 집에 뱀이 있다며, 사색이 되어서 두 번 다시 그 집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한다. 그녀는 뱀에 대해 극한의 공포를 갖고 있다. 마르코는 그 집에 들어가 뱀을 몽둥이로 때려잡은 후 리디야의 핸드백을 챙겨 나온다. 마르코의 눈은 또다시 눈물로 얼룩져있다. 뱀 공포증에 대해 가족밖에 모르니 외부에 알리지 말아 달라는 리디야에게 마르코는 전에도 그런 사람을 본 적 있다는 말을 한다.


리디야는 동료 투우사와 연인 사이였지만 지금은 버림받은 상태로 마르코와 만나게 된다. 하지만 이내 투우 경기에서 심각한 부상으로 식물인간 상태로 베니뇨의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마르코는 병실을 지키지만 식물인간이 된 리디야가 다르게 느껴진다며 그녀에게 손도 대지 못한다. 그리고 잠깐 쪽잠을 자는 동안 리디야와 봤던 어쿠스틱 기타의 공연을 떠올린다. 그 공연은 Caetano Veloso의 공연이다. 어쿠스틱 기타 소리에 어우러지는 매우 구슬픈 곡이다. 영화 안에 배치된 또 하나의 공연. 마치 ‘귀향(volver)’에서 여주가 노래 부르는 장면과도 유사하다.

https://youtu.be/1emgUdD3_pE

‘그녀에게’ 중 노래 장면

마르코는 이 공연을 들으며 눈이 촉촉해진다. 그는 자리를 뜬다. 리디야는 마르코를 쫓아 야외 공연장 밖으로 나오고, 마르코에게 예전 연인이 뱀 공포증으로 텐트에서 자다 뱀에 놀라 알몸으로 뛰쳐나간 적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회상이 끝나고 다시 병원. 마르코는 병원을 활보하다 베니뇨가 간호하는 코마상태인 알리샤를 보게 된다. 알리샤는 교통사고로 코마 상태로 병원에 입원한지 4년째. 베니뇨가 마치 살아있는 사람 대하듯 알리샤에게 말을 걸고, 그녀에게 마사지도 해주는 모습. 그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본다. 베니뇨는 리디야 몸에 손도 못 대겠다는 마르코에게 ‘그녀에게 말을 걸어봐’라는 조언을 한다. 여성들은 다 들을 수 있다는 듯이. 심지어 코마상태이지만 아직 살아있다고 믿고 있는 듯하다. 베니뇨는 알리시아에게 공연 얘기를 해주고, 본 영화 줄거리 얘기를 해준다.


사실 베니뇨가 그녀에게 들려준 흑백 영화 이야기는 기이하다. 실험을 하는 여자 과학자와 애인인 남자의 이야기인데, 잘못된 실험약으로 애인인 남자가 점차 줄어들어 크기가 작아져버렸다. 핸드백에 들어갈 정도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남자는 자신의 애인의 생식기 안으로 들어가 (불가할 것 같은 상식을 벗어나) 나름 자신의 애인과 자신의 방식대로 사랑을 나눈다. 베니뇨는 이 이야기를 알리샤에게 들려준다. 그의 표정, 말투, 마사지하는 손놀림, 숨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리디야 사고 전, 마르코가 옛 애인의 결혼식에 참석했을 때, 그곳에 온 리디야. 눈물을 흘리는 리디야를 보고, 마르코는 그녀가 결혼식에 감동해 운다고 생각한다.


당시 마르코는 알지 못했지만 이미 리디야는 옛 투우사 애인에게 돌아가기로 하고 그 말을 하기 위해 마르코를 찾아갔었다. 리디야가 혼수상태가 되자 옛 애인이 그곳에 등장한다. 그리고 마르코는 그들이 이미 화해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리디야를 그녀의 연인에게 두고 업무 차 요르단으로 떠난다.


마르코가 떠나고 얼마 후 병원 회의가 소집된다. 알리샤가 임신을 했다는 소식과 함께 병원이 뒤집어진다. 베니뇨는 의심을 받고 교도소로 수감된다.


마르코는 소식을 듣고 마드리드에 돌아와 베니뇨를 찾아가고, 마침 마드리드에서 집을 찾고 있던 마르코에게 베니뇨는 집을 선뜻 내어준다. 베니뇨는 아이가 살아있는지 알리샤가 어떤지 물어본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의 안부가 궁금하듯 그의 애정과 간절한 눈빛 표정 말투 모두 사랑하는 연인을 그리워하는 바로 그 모습을 띄고 있다.


마르코는 베니뇨의 집 건너편 발레교습소를 보게 되고, 놀랍게도 퇴원한 알리샤,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단발머리에 다리가 불편하지만 앉아서 수업을 참관하는 그녀를 목격한다. 마르코는 수소문 끝에 베니뇨의 변호사를 통해 아이의 사산을 알게 되고 알리샤가 깨어난 것에 대해서 그리고 아이에 대해서 일제 베니뇨에게 말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마르코는 베니뇨를 찾아가지만, 아이에 대해서 아는 것도, 알리샤의 소식도 전하지 못한다. 죗값으로 그곳에 평생 복무해야 된다는 걸 아는 베니뇨는 편지를 남기고 목숨을 끊는다.


클로징

마르코는 다시 피나 바우쉬의 ‘마주르카 포고’ 공연을 보러 공연장을 찾는데 그곳에서 우연히 알리샤와 그녀의 발레선생이 공연을 보고 있는 것을 목격한다. 이 공연을 끝으로 마르코와 알리샤는 눈빛 교환을 하고 영화는 막을 내린다. 마치 그들의 관계를 암시라도 하듯이.

(*이 작품 ‘마주르카 포고’ 설명은

다른 글에 있습니다)


관람 포인트


1. : ‘사랑’의 착각 혹은 ‘집착’ 그 일방향성에 대하여


베니뇨x알리샤

살아서는 그 둘의 관계가 불가능해 보였지만 오히려 식물인간이 되었을 때 가능해진 한 외로운 인간의 짝사랑 러브스토리(그의 시선에서 봤을 때) 혹은 사이코패스 집착 이야기(다른 사람의 시선에서 봤을 때)


역시 모든 터부는 부정하고 깨야하는 알모도바르 감독. 그의 영화 속 성직자들의 타락한 모습, 가족 내 성폭력, 가부장제의 폭력성, 성소수자들, 성적 정체성에 대한 혼란, 외로움 집착까지. 그의 세계에선 세상이 배제하고자 하고 감추고 싶어 하는 모든 것들이 수면 위로 드러난다. 그리고 ‘보고 싶지 않아 외면해 온 불편한 주제들은 네가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도록 내가 최대한 그로테스크하게 보여줄게. 한 번 그 주제에 대해 생각해봐.’라고 말하는 듯하다. 반듯한 건 자고로 깨어보고 비틀어보며 단단한 겉 포장을 벗겨내고 속을 환히 드러내고 봐야만 하는 감독.


여기서 식물인간이 된 알리샤를 지극정성으로 돌보는 이는 바로 그의 가족도 아닌 베니뇨이다. 나는 여기서 감독이 사랑의 본질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고 보았다. 배려하는 것, 케어하는 것, 그 사람을 살아있듯 대해주는 것. 사랑 아니라 할 수 있는가? 일방적인 사랑도 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가?


이 영화에서 사랑을 언급하기엔 마음 한 곳이 불편한 건 이 사랑이 ‘일방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알리샤의 의견을 들을 수 없다. 그녀는 코마상태이기에 계속 침묵한다. 한 사람의 ‘사랑’이 짝사랑일 때 이는 상대방에게 ‘집착’, ‘부담’, ‘공포’ 나아가 ‘폭력’이자 ‘범죄’까지 될 수 있는 이유이다.

하지만 알리샤가 사고 당하기 전 무용교습소를 엿보고, 교습소를 나서는 알리샤를 쫓아가는 베니뇨의 모습에 관객이 불편한 이유는 바로 그 일방향성, 스토킹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연인관계에서도 전화를 하고, 찾아가서 만나고, 신체접촉을 하고, 사랑을 나누지만 이 똑같은 행위가 서로의 동의가 아닌 일방향성이 되면, 범죄가된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존엄하기에, 상호 동의하지 않은 관계에서의 일방적인 구애행동(이성이건 동성이건 가족구도 내에서건)은 강요이자 위협으로 느껴지고, 그걸 원하지 않는 상대방에겐 신체 정신적으로 해를 끼칠 수 있다.

그렇다면 의사표시가 거세된 상태일 때 한 사람의

‘사랑’이라는 감정은 왜 경계 대상일까.

인간은 기본적으로 나의 욕구를 우선시하기 때문일 것 같다. 나의 욕구가 우선시 되면 상대의 욕구와 상충될 때 그의 욕구는 고려대상이 아닐테니 묵살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상대방의 의견을 묵살하기가 편리하다. 이미 상대방은 의사표시가 거세된 코마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애초부터 베니뇨의 시선에서 본 ‘사랑 이야기’는 왜곡된 모습을 담고 있다. 그의 눈으로 본 일방적인 사랑이야기.


여기서 베니뇨는 자신의 욕구와 남의 욕구를 분간하지 못한다. 자신이 하는 것은 사랑이라 굳게 믿으며, 알리샤를 사랑하는 것이 상대방에겐 어떤 건지 그녀의 입장에서 헤아리지 못하는 병적 상태인 것이다. 자신이 좋은 걸 주면 당연히 사랑하는 사이라고 믿는 것. 당연히 상대방이 자신을 사랑할 것이라고 믿는 것. 베니뇨는 알리샤와 결혼할 것이라고 마르코에게 말한다. 결혼이란 두 상대방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른 혼인약속인데, 그 정의를 깨려는 그의 행동. 하지만 본인이 그 정의를 깨려고 하는지조차 인지가 안되는 정신의 상태. 상대방도 자기와 똑같이 생각한다고 믿는 것. 바로 경계성의 붕괴이다.


그의 모자관계, 15년간 그의 어머니를 앞뒤를 씻겨가며 돌보았다는 데서 들을 수 있듯이, 어머니와의 비정상적인 삶에서도 서로의 삶의 경계가 붕괴되었듯이, 그와 알리샤의 관계도 경계가 붕괴되어있다. 그녀의 감정 사고도 모두 자신이 생각한 대로 믿어버린다. 역사는 되풀이되듯이...


2. 가족이라는 공동체에 대한 생각


리디야는 평생 이등 투우사로 남아야 했던 아버지의 한을 풀기 위해 투우사 길을 걷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간접적으로 언니 입을 통해 듣게 된다. 풀리지 않은 한은 대물림 될 시 자식 인생 잡아먹는다는 교훈. 결국 투우사가 된 리디야는 투우경기에서 사고로 인해 식물인간이 되고 죽고만다. 얼마나 많은 대한민국 자식들이 부모 한을 풀어주기 위해 자기 인생이 아닌 부모 대리 인생을 사는가? 그 굴레를 벗지 못하고 지금도 힘겨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벗어버려야 하는데 계속 거머리처럼 들러붙는 그 속박에 대하여.


3. 공포이야기


리디야는 무엇보다 용맹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직업을 가진 여자 투우사이다. 외모는 여성스러움보다는 남성적이고 중성적이고 강하다. 마치 남자 같다. 그녀는 남성들만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어떤 것을 감추어야 했던가. 그의 약점. 연약함. 그런 치부들을 숨겨왔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한 특정 생물체에 투사되어 나타났을 때 수면 밑에 숨겨 놓은 감정이 걷잡을 수 없듯이 제어되지 않는다. 투우사 제복을 입었을 때의 몸가짐.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갖춰 입는 착복하는 모습과 그와 대조적으로 아무것도 컨트롤하지 못하는 혼비백산한 모습. 그녀가 도망치는 건 결국 억누르고 있던 죽음에 대한 공포가 아닐까? 우리가 억누르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나의 두려움을 어디에 투사하고 있나?


마르코의 옛 애인 또한 뱀 공포심을 갖고 있었다. 텐트에서 자다가 나체로 뛰쳐나갈 정도의 극강의 공포심. 나체로 뛰어나간 다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도 모두 버린 채 공포 앞에서 무기력한 인간의 모습을 그려낸 거라 생각한다. 그것 또한 자신의 불안감을 투영한 뱀이라는 죽음을 상징하는 존재로부터의 도망이었으리라.


4. 마을로 돌아가는 구도


알모도바르의 영화에 계속해서 등장하는 주제인 약물중독. 마르코의 옛 애인은 마드리드에서 약물 중독되어 결국 그의 부모 곁인 마을로 내려가서 살며 그곳에서 결혼한다.


도시에서 탈출하면서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해결책은 ‘내가 뭘 잘못했길래’, ‘귀향(volver)’, ‘페인엔글로리(Pain and Glory)’에서도 유사하다.


도시는 그의 세계에서 힘듦 고됨 노동 그리고 마약과 연관성을 띤다.


마을. 마을로의 회귀는 자신의 옛 것과 조우하려는, 좋았던 시절로 돌아가 치유하려는 회귀본능이다. 그리고 과거의 장소로 돌아갈 때 비로소 치유가 일어난다.


5. 무용극 두 편


알모도바르는 피나 바우쉬의 작품에서 두 여인을 보며, ‘그녀에게’에 딱 알맞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실제 코마상태의 그녀들의 모습과 카페 뮐러의 두 여인의 모습 모두 눈 감은 상태의 모습이다.


또한 마주르카 포고에서의 여주인공은 말을 하고 싶어도 탄식소리만 나오며, 즉 목소리를 빼앗겼으며, 남자들의 손에 이끌려 수동적으로 이동하는 모습에 주도적으로 살지 못하고 이끌리는 비운의 운명을 가진 존재의 슬픔이 괴로움이 느껴진다. 목소리를 많이 빼앗겨 본 사람은 알 수 있다. 마이크가 주어져도 탄식 소리만 나오는 그 뼈아픔을...


마주르카 포고에서는 다른 장면도 있다. 여러 여자 무용수들이 경쾌하게 남자 무용수들과 춤을 추는 장면은 이 작품에서 그려지는 가장 유쾌한 장면이다. ‘카페 뮐러’의 음산함으로 오프닝을 시작한 이 영화는 유쾌한 장면으로 끝을 맺어 결국 인간 존재의 회복성과 승리를 상징한다고 보았다.

마치 베니뇨의 케어로 인해서

알리샤가 살아났듯,

아수라장과 같은 긴 코마 인생 속에서도

타인의 돌봄을 통해 끈질긴 생명력이 승리한듯하다.

결국 마지막 경쾌한 댄스는 알리샤가 어려움을 통과해 새 인생을 선물로 받음을 축하하는 댄스와도 같이 느껴진다.


6. 기억 곧 상처


기억을 재구성하는 작품. 심리학에서 예전 상황을 그대로 재현해내서 상처를 치유하는 역할극을 하는데.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작업이라 생각한다. 피나 바우쉬의 작품도 그러한 자신의 상처 곧 기억, 응어리져 있는 감정, 관계에 대한 생각을 분출해내는 도구라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 고통스러운 장면이 많고 불편함이 많다. 인생에는 그런 기억들이 많지 않은가. 피나 바우쉬는 몸짓, 춤으로, 알모도바르처럼 영화감독은 영화로 자신의 머릿속 마음속 감정들을 분출해내는 것.


7. 외로움


베니뇨는 외로운 인물이다. 아버지는 멀리 떠나고, 평생을 가족 구도에 갇혀 비정상적으로 엄마의 수발을 들으며 젊은 인생을 바쳐왔다. 그 외로움, 관계에 대한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대상으로 알리샤를 골랐다.


마르코 또한 외로운 인물이다. 아직 상처를 안고 있는 인물. 상처를 자극받을 때마다(예술작품 관람, 뱀을 죽일 때, 베니뇨를 교도소에서 방문했을 때)마다 감정의 변화를 보이고 눈물을 흘린다.


8. 상호적인 인간관계의 가능성


알리샤x마르코


서로를 공연장에서 보고 응시하는 두 남녀. 이 관계에서는 더 이상 베니뇨x알리샤 관계에서의 병적이고 일방향성이 아닌 상호성을 기대해볼 수 있는 관계이기때문에, 인간관계의 회복과 희망을 담고 있다고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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