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은 길은 굽게, 곧은 길은 곧게
분주한 발걸음으로 회사문을 나선다.
밖으로 나서자 따스했던 체온이 급격히 차가워졌다. '요 며칠 강추위가 온다더니 정말 춥구나.' 서둘러서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버스가 그새 지나갈까 봐 찬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열심히 뛰어갔는데 집 앞 까지 데려다 주는 507번 버스는 깜깜무소식이다. 100번, 111번, 204번.. 여러 대의 버스가 눈앞을 지나간다. 괜히 아직도 도착하지 않은 507번 버스의 기사님까지 원망스럽다. 평소에는 기다리지 않아도 잘만 도착하더니, 하필 오늘같이 추운 날 아무리 기다려도 버스가 오지 않는다. 택시를 탈까 망설였지만 지금까지 기다렸던 것이 아쉬워 괜한 고집으로 무모한 싸움을 계속하였다.
무언가를 애타게 기다리는 마음은 참으로 오랜만이다. 익숙함에 익숙해지다 보니 일상에서의 행복을 어느새 너무도 쉽고 당연한 일로 생각을 하진 않았나,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버스기사님이 운전을 해서 수 많은 정류장을 거쳐와야 한다. 승객은 오는 버스에 올라타면 끝이지만, 버스는 쉬지 않고 달린다. 지난날 오래 기다리지 않고 도착했던 버스는 일상 속의 행운이었을 지도 모른다. 익숙함에 익숙해져서 누리지 못했던 소중함. 그것은 아마도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곳에 숨어있었기에 깨닫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기에 고마움을 잊고 사는 공기처럼.
20분쯤 지났을까? 저기서 507번 버스가 달려온다. 혹시나 버스가 나를 발견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칠까 봐 서둘러 버스 쪽을 향해 탈 의향을 표했다. 버스는 서서히 속도를 줄이더니 정류장 앞에 멈춰 섰다.
버스 문이 열리자 따뜻한 내부 공기가 뿜어나왔고, 차갑게 식은 몸을 감싸주었다. 괜히 툴툴거렸던 마음까지도 따뜻한 공기에 사르르 녹아내렸다.
덜컹거리는 버스에 올라탄 후 제일 뒷자리에 앉았다.
나는 버스가 한눈에 보이는 제일 뒷자리가 가장 좋더라. 특히 퇴근길 뒷자리에 앉아 바라보는 버스 안 풍경은 한편의 드라마 같다. 각자의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다들 자신의 자리에서 오늘 하루도 열심히 살아낸 것 같아 괜한 감동과 격려를 받는다. 버스 안 모두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지만, 알 수 없는 유대감이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었다.
창밖의 모든 것들이 스쳐간다.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지만, 모든 사물이 등 뒤로 향한다.
버스는 우리를 태우고 앞을 향해 달려간다.
사실 퇴근은 후퇴하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었다. 직장이라는 전선에서 열심히 전투를 치른 후 정비를 위해 집으로 후퇴했다가, 다음날 다시 전선으로 출근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 향하는 버스에 앉아 있으니, 퇴근길은 후퇴하는 길이 아니고 시작되는 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 종일 쓰고 있었던 답답한 가면을 벗어 버리고 진짜 내 모습으로 돌아가 진정한 내 삶을 시작하는 시간. 그 시간이 그리 길지 않더라도 좋은 이유는 김대리가 아닌 본래의 나로 돌아가기 때문이 아닐까.
507번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길.
나태주 시인의 '사는 일'이라는 시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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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하루 잘 살았다
굽은 길은 굽게 가고
곧은 길은 곧게 가고
막판에는 나를 싣고
가기로 되어 있는 차가
제시간보다 먼저 떠나는 바람에
걷지 않아도 좋을 길을 두어 시간
땀 흘리며 걷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나쁘지 아니했다
걷지 않아도 좋을 길을 걸었으므로
만나지 못할 뻔했던 싱그러운
바람도 만나고 수풀 사이
빨갛게 익은 멍석딸기도 만나고
해 저문 개울가 고기비늘 찍으러 온 물총새
물총새, 쪽빛 나랫짓도 보았으므로
이제 날 저물려고 한다
길바닥을 떠돌던 바람도 잠잠해졌고
새들도 머리를 숲으로 돌렸다
오늘도 하루 나는 이렇게
잘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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