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날마다 시

무녀리

이강산

by 새글

무녀리

이강산



한파주의보 내린 줄 모르는지 베란다 창밖 화분에서 영산홍 핀다


저것, 두 해 째 춘삼월 활짝 피어 꽃다발 이루었던 것, 월동越冬 잘하려나 훔쳐보던 것

딱 한 송이 핀다


나는 초겨울 아침의 개화가, 저 무녀리가 불안하다

볼수록 춥다


반가움이 아니다

내게 꽃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그에게 가슴 서늘한 무녀리겠는가, 생각뿐이다


내게 마른 호수가 그랬던 것처럼 그에게 내 밑바닥 드러낼 수 있는가, 생각뿐이다


내 정수리에 떨어진 은행잎

은행잎 덮고 죽은 고양이


나도 그에게 부르르 몸 떨리는 주검이겠는가, 생각뿐이다


저것, 날 더러 보라고, 한파주의보 내린 줄 번연히 알면서 가던 길 내처 걸어가는 꿍꿍인 양

팔다리 휘휘 젖는다


덧붙임: 무녀리란? 한 태에 낳은 여러 마리 새끼 가운데 가장 먼저 나온 새끼.



날시예감

나도 무녀리다. 한 집에서 장남과 장녀는 무녀리의 운명을 저절로 타고 난다.

문열이가 혹 무녀리로 바뀐 것은 아닐까?


이강산 시인도 무녀리로 알고 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무녀리의 운명은 대개 비슷하다.

집안의 운명을 져야 하는 기대를 안고 자기희생이 먼저 요구되는 위치다.

신산스러운 삶을 이고 나온 것이다.

한파주의보가 내려진 삶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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