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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글 Jun 23. 2021

뿌리에게

나희덕

뿌리에게

나희덕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 

나는 막 갈구어진 연한 흙이어서 

너를 잘 기억할 수 있다 

네 숨결 처음 대이던 그 자리에 더운 김이 오르고 

밝은 피 뽑아 네게 흘려보내며 즐거움에 떨던 

아, 나의 사랑을 


먼우물 앞에서도 목마르던 나의 뿌리여 

나를 뚫고 오르렴 

눈부셔 잘 부스러지는 살이니 

내 밝은 피에 즐겁게 발 적시며 뻗어 가려무나 


척추를 휘어접고 더 넓게 뻗으면 

그때마다 나는 착한 그릇이 되어 너를 감싸고, 

불꽃같은 바람이 가슴을 두드려 세워도 

네 뻗어 가는 끝을 하냥 축복하는 나는 

어리석도고 은밀한 기쁨을 가졌어라 


네가 타고 내려올수록 

단단해지는 나의 살을 보아라 

이제 거무스레 늙었으니 

슬픔만 한 두릅 꿰어 있는 껍데기의 

마지막 잔을 마셔다오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때 

내 가슴에 끓어오르던 벌레들, 

그러나 지금은 하나의 빈 그릇, 

너의 푸른 줄기 솟아 햇살에 반짝이면 

나는 어느 산비탈 연한 흙으로 일구어지고 있을 테니 



날시예감

나희덕 시인의 따순 모성애에 가슴이 찌릿해져 온다.

시인은 받으려 하는 사람이 아니다. 항상 줄 것만을 찾는다.

받을 거라곤 아픔들, 버려진 것들, 슬픈 감정 들일뿐이다.

대신 아파해주고 보듬아 주고 울어주는 게 시인의 몫이다.

나도 그런 시인일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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