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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모대왕 Oct 20. 2020

살고 싶다는 농담

피해 의식을 벗어나 포스가 함께하길

Part 1.

1. 사람의 죽음에는 드라마가 없다. 더디고 부잡스럽고 무미건조하다. 몇 년 전 급성 심근경색과 악성 고혈압을 앓았다. 심근경색은 죽음과 너무나 가까운 단어다. 2년에 걸쳐 두 차례의 스텐트 시술을 한 뒤 많이 호전되었고 지금까지 혈압약을 먹으며 살고 있다. 건강하게 살 때는 몰랐던 숨쉬기, 자기, 걷기, 보기, 만지기와 같은 기본적인 신체 활동에 감사함을 느낀다. 살아있는 것을 느낀다. 나도 이 시기를 겪으며 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내 가족들에게 제때에 제대로 고맙다고 말하며 살고 싶다.


2. 병원에서 누워 있으면 천장을 보게 된다.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왼쪽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기도 하고 발가락이라도 보고자 끙끙거리며 몸을 치켜세운다. 살면서 병원에 입원한 적이 두 번 있는데 나머지 하나는 대학교 시절이다. 이 글을 읽는 내 동기나 후배들은 알만한 한일월드컵이 있었던 2002년도 이야기다.


3. 나는 피해의식을 자의식으로 덮으려고 부단히 '쎈' 척을 해왔다. 2002년 머리를 하얗게 염색하고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의 과회장 옹립식에서 소주 한 병을 원샷하고 과구호를 외쳤다. 많은 후배들이 나의 소주 한 병 원샷을 따라 했고 수많은 뒤풀이와 MT에서 시체가 되었다. 단과대학 해오름식에서는 돼지 머리를 올려놓고 과회장들이 돌아가며 막걸리를 마시고 절을 했다. 이 우스꽝스러운 고사가 끝나면 각 과의 달리기 대표들을 한 데 모아 놓고 '돼지머리 쟁탈전'을 한다. 영어과는 단 한 번도 돼지머리를 가져간 적이 없다. 난 반칙을 쓰기로 했다. 그런데 반칙을 했음에도 돼지머리는 남의 머리가 되었다. 빌어먹을. 


4. 학교 앞에서 여느 때와 다름없이 뒤풀이를 했고 난 02학번 새내기들과 맥주 글라스에 소주를 따라 마시며 '쎈' 척을 했고 몇 번의 '쎈' 척을 하고 눈을 뜨니 병원에 누워 있었다. 자취방 앞에서 나를 부축해주던 후배들을 밀치고 지랄을 하다가 현관 유리에 오른팔을 다친 것이다. 다친 부위는 이두와 삼두 부근이었고 큰 혈관과 신경이 끊어졌다. 다음날 미세 접합 수술을 하고 병원에서 한 달을 보낸 뒤 오른팔에 깁스를 하고 퇴원했다.


5. 오른팔에 감각이 없었다. 우울했다. 오른팔 수술 부위의 상처는 프랑켄슈타인의 그것과 비슷했다. 감각이 조금씩 돌아왔다. 그래도 우울했다. 삶이 망가졌다. 망가져 있다, 는 말을 내가 얼마나 쉽고 편하게 써왔는지 그때 알았다. 매일 소주를 마셨다. 소주로 망가졌는데 다시 소주를 마셨다. 위태로운 희망은 망가뜨리는 것이 낫다. 


6. 학교로 돌아가 과회장 컴백을 거국적으로 알리기 위해 '영어과 바비큐 파티'를 개최했다. 잘 됐다. 집에 돌아오니 다시 우울했다. 고등학교 친구가 연락을 해왔다. 알고 보니 Amway였다. 그전에 다단계 설명을 들은 경험이 있어서 비교를 하며 들을 수 있었다. 너무 좋아 보였다. 바로 가입을 했다. 제품을 써보고 '입소문'을 내면서 판매도 해보았다. 팔렸다. <카네기 인간관계론>을 읽고 자신감이 생겼다. 이때 감각이 60% 정도 돌아왔다. 여름이었다. 나는 살기로 결정했다. 내가 그날 밤 겪은 일 때문이 아니다. 살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7. 친구와 함께 월드컵 거리 응원전을 다녔다. 오른팔에 깁스를 하는 동안 왼손으로 젓가락질을 했다. 그 덕분에 왼손으로 페이스페인팅을 했다.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신사동에 영어학원에서 면접을 보았고 합격했다. 우울함을 떨쳐내고 새롭게 돈을 벌어 보았다. 벌어질 일은 반드시 벌어진다. 이때부터 학원 생활이 시작되었고 지금은 원장을 하고 있다. 우리의 삶은 남들만큼 비범하고, 남들의 삶은 우리만큼 초라하다.



Part 2.

1. 태어나서 죄송합니다. 만약에 내 부모가 지금 내 앞에 있다라면, 이 말을 하고 부모를 버리고 싶다. 버림받는 것보다 버리는 것이 좋다. 그래서 다들 애를 버리나 보다. 연인을 차 버리는 것과 부모가 자식을 버리고 등지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사생아로 태어나서 35세에 고아가 되었다. (... 중략...) 그리고 나는 그냥 나의 가족을 이루었다. 살면서 가장 잘한 결정이다. 하지만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경험했듯이, 서로 마주하고 아픈 걸 들추어 공유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지금 내가 그렇다.


2. 대부분의 성공에는 운이 따른다. 반면 실패는 악운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실패는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 나는 '쎈' 척만 할 줄 알지 '약한' 척은 못한다. 그래서 실패다. 처세술을 읽어 봤자 자신의 감정과 본능은 숨길 수 없기에 쓰디쓴 실패를 겼었다. 실패를 더 빨리 했어야 했는데 너무 늦어서 애처롭다. 다들 빨리 실패하시길.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은 끔찍하다. 이 생이 다시 한번 벌어진다니! 상처와 아픔, 배신과 실패 빼고 다시 한번! 은 괜찮을지 모르겠다. 위버멘쉬는 글렀다.


3. <깊은 밤 갑자기>의 김영애를 보기 위해 유튜브에서 영화를 검색해 보았다. 참 좋은 세상이다. 완전히 미쳐버린 아내(김영애)의 모습을 표현해낸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말 그대로 충격적이다. 꼭 봐라. 



Part 3.

1. 바꿀 수 없는 것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은혜와 바꿔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이 둘을 분별하는 지혜를 허락하소서. 정말 바꿀 수 없는 건 이미 벌어진 일들이다. 즉, 과거를 말한다. 몇 번 시도했지만 과거를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은혜를 아직 못 받았다. 안 준다고 하면 받을 생각도 없다. 오히려 정체성을 헤칠 수 있으니 내버려 두는 것도 좋겠다. 다만 기도는 하겠다.


2. 때와 장소에 알맞은 가면을 가려 쓸 줄 안다는 건 돈을 주고도 배우기 어려운 능력이다. 퇴근할 때 레이디 가가의 [포커페이스]를 들어야겠다.


3. 괴물은 먹고살기 위해 피를 빨지만 사람은 욕심을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의 피를 빨고 산다. 그것도 훨씬 더 많은 사람을 말이다. 누가 진짜 괴물이란 말인가. 정답은 바로 '나!' 


4. 나쁜 피해자를 이야기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착한 피해자를 이야기하는 사람도 진짜 피해자를 궁지에 몬다는 점에서 전혀 다를 게 없다. 그래, 네 얘기다.


5. 행복한 사람은 거만했고, 거만해서 재수 없었다. 나는 거만하고 재수 없다.


6. 상처는 상처이고 인생은 인생이다. 우리들 모두 말 못 할 사정과 상처는 하나씩 가지고 있잖아요. 그렇죠?


7. 포스가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바라며. 살아라. May the force be with you. Be alive!


*굵은 색 단어와 문장은 책에서 발췌했습니다. 책을 읽으며 생각난 것들과 감상을 작가의 생각과 견주어 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허지웅 작가님에게 공감을 표하며 책 제공해주신 웅진지식하우스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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