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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옥 Jan 12. 2018

내일의 계획

#91

새해라고 해서 특별히 계획을 세우지 않은 지 오랜데, 라디오에서나 TV에서나 몇 시간 후면 새해가 시작된다고 자꾸 알려준다. 새해? 수돗물이 끊어진다는 아파트 안내방송이라도 들은 양 서둘러 빨랫감을 찾았다. 베란다로 뛰어가 빨래바구니 속에 든 빨랫감을 뒤적거리다 손목이 시원치 않다는 생각이 스치자 수건, 양말, 손수건, 마스크만 몇 개 집어 들었다. 보신각 앞에 선 아나운서는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처럼 흥분하며 떠든다. 링에서 쓰러진 권투선수를 보며 하나, 둘, 셋 카운트다운을 하는 듯하다. 수돗물을 크게 틀었다.

'제발 들리지 말아다오. 나는 싫다. 보신각 종소리도, 곧 새해가 된다는 소리도 싫다.'


다른 이에게는 희망의 새해겠지만 나는 그저 이 시간에 빨래를 하고 싶다. 세탁기를 돌리고 싶으나 아래위 붙어사는 아파트에서는 삼갈 일이다. 빨랫비누를 칠하고 두 손으로 빡빡 문지르고 다시 펴서 또 문지르고 일어난 거품을 보며 ‘나가라, 멀리 나가라’ 하며 헹구고 또 헹군다. 그리고 두 손목이 아프게 꼬옥 짠다. 탁- 탁- 소리도 요란하게 털고 또 턴다. ‘반듯하게 펴져라’ 하면서 건조대에 널었다. 자꾸 잡아당겨 또 편다.

TV에서는 흥분과 아우성이 끝났다. 조용하다. 책꽂이를 들여다보니 오래 눈에 익은 커다란 비닐봉투 속에 붉은 수첩이 보인다. 손을 대다 말다 하다가 꺼내어 들추어봤다. 내가 적은 거창한 다짐들이 가만히 나를 바라본다. 내일 할 일을 적어야지. 내일은 새해지만 오늘이 가면 오는 새날이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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