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패

#20 즐거운 나의 집

by 김경옥

몇 칸짜리 집을 어렵사리 마련하면 이름 석 자를 새겨 대문에 걸어두었습니다. 집 크기에 따라 가격에 따라 또 그 주인의 취향에 따라 다 다른 모양이었지만 대개는 세로로 세워진 나무토막에 먹물로 이름 석 자를 쓴 다음, 그 위에 니스를 발라 오래도록 사용했습니다.


문패에 송곳으로 구멍을 뚫고 나무 대문 기둥에 못으로 쾅쾅 박으면 이제 내 집입니다, 이곳이 내 왕국이다 했습니다. 내 이름을 걸어놓고 내 집 앞을 깨끗하게 하지 않을 수 없어서 가을에 낙엽 떨어지면 열심히 쓸고, 겨울에 함박눈이 내리면 아이들과 어울려 커다랗게 눈사람을 만들어 함석 대야를 머리에 씌우고 싸리 빗자루 옆에 세워 떡 하니 대문 앞에 내놓았습니다.


대리석을 음각해서 한문을 먹물로 쓴 문패도 있었는데 주인의 생김새도 무서울 것 같고 왠지 차가운 기운이 돌았습니다. 그 집 앞은 항상 조용해서 드나드는 사람도 없이 굳게 닫힌 문만 버티듯이 서 있었습니다. 눈 오는 날엔 자기네 넓은 마당에 눈사람을 만들어 자기들만 보는지 대문 앞 눈사람도 없었습니다.


또박또박 친절하게 한글로 쓴 문패가 마음씨 좋은 사람이 사는 집 같아서 제일 좋았습니다. 시골티가 물씬 나는 이름을 보았을 때는 친구끼리 많이도 웃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절 흔하지 않았던 외자 이름, 또 분명 여자 이름 같은데 문패에 쓰여 있는 이름들은 참 이상해 보였습니다. 문패가 없는 세상에서 돈을 벌어 집을 사는 재미가 있을까요?



즐거운 나의집1.JPG


이 작품은 문패가 붙어 있던 어릴 적 우리 집입니다. 고무줄넘기하고 공기놀이하고 봉숭아 물들이던 곳, 남동생들이 코 흘리며 딱지 따먹기 하던 곳. 서울시 종로구 충신동 53-17번지 나무 대문 앞에 걸렸던 우리 아버지 성함 석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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