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기차에 쓰는 편지
<지붕 위의 바이올린>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척박한 땅에서 가난하게 살면서도 전통을 유지하며 삶의 균형을 잃지 않은 유태인들의 이야기입니다. 우유배달부 ‘테비에’는 아내와 다섯 명의 딸들과 정직하게 열심히 살아갑니다. 큰딸은 겨울에 다람쥐가 사는 모습처럼 가난하게 사는 재봉사의 아내입니다. 그러나 이들 부부는 너무 행복한 나머지 자기들의 비참한 현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둘째딸은 세상을 뒤집어놓겠다고 옛날 방식을 변화시키겠다고 큰소리치는 외지에서 온 혁명가에게 마음을 줍니다.
어느 겨울날 추운 새벽, 아빠와 딸은 보이는 것이라고는 벌거벗은 앙상한 나무들과 흙먼지 자욱한 광활한 벌판에 있는 낡은 간이역 의자에 나란히 앉았습니다. 끔찍한 곳, 시베리아 개척지로 붙잡혀간 혁명가를 찾아 둘째딸이 떠나는 날입니다. 고생이 심할 텐데 안 가면 안 되냐고 묻는 말에 딸은 혼자 두어서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마음, 그 마음 하나로 떠난다 합니다. 무지막지한 검은 기차가 폭풍 같은 시커먼 연기를 내뿜으며 달려옵니다. 커다란 괴물 같습니다. 둘째딸은 울먹이며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은 하나님만 아시겠죠?”라는 말을 남기고 기차에 올라탑니다. 거대한 변화를 위해서 무거운 발로 올라탄 그 기차에 나도 따라 오릅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하고 아이 셋을 낳고 다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앞에서 잡아당기고 뒤에서 밀어붙이는 어떤 힘에 시달리다 못해 막내아이가 유치원에 입학한 해 7월에 대학원이라는 곳에 휩쓸려 들어간 것입니다.
갑자기 진행된 일이라 입학원서를 넣는 시간도 급박했고 원서에 넣을 사진도 장마철 빗속에 남의 집 처마 밑에서 비 맞은 베트콩 얼굴로 찍었습니다. 막내를 유치원에 밀어넣고 합격발표도 나기 전에 오이지 넣은 도시락을 싸들고 대학 선배님 한 분만 믿고 학교에 나갔습니다. 식구들에게 인정받으려고 자는 아이들 얼굴을 이마, 코, 입, 눈, 귀 할 것 없이 하나하나 손으로 만져보고 가로, 세로, 둘레를 줄자로 재서 흙으로 빚었습니다. 목욕탕에 가서는 여인들의 움직임을 보느라 몇 시간씩 탕 안에 있었습니다. 이 땅의 평화를 위해 평화로운 작품을 하자는 비장한 마음은 평화로운 아이들의 모습에서 시작해 풍요롭고 평화로운 땅을 의미하는 ‘대지의 여인’까지 이어졌습니다. 기차의 칸칸마다 있었던 고비를 내면의 치열한 싸움과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그럭저럭 넘기고 나니 마음에 흔적이 남았습니다. 그것은 온전히 나의 몫입니다.
내리는 눈을 봅니다. 눈은 내가 일부러 뭉치지 않아도 나무는 나무 모양대로 장독은 장독 모양대로 가로등은 가로등 모양대로 거리의 시계탑은 시계탑 모양대로 형태를 만들어줍니다. 비는 내리면서 흘러갑니다. 그것도 내 의도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대로 흘러갑니다. 가다가 앞이 막히면 옆으로, 옆이 막히면 그대로 잠시 멈춥니다. 빗물이 흘러와서 밀어낼 때까지.
세상을 뒤집어놓겠다는 혁명가는 보이지 않고 덜컹거리는 낡은 기차가 힘겹게 내는 기적 소리가 들립니다. 기차에 편지를 띄웁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 뜻대로 되는 일은 하나도 없으면서 내 뜻이 아니면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