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기차에 쓰는 편지
안개비 내리는 무덤을 바라보고 있다.
한 폭의 수묵화 같은 침묵이 고요히 흐른다.
진정으로 무덤이 무엇인지 안다면
이 세상은 화목할 것 같다.
몇 년 전부터 도심에서 밀려난 내 작업실은 벽제 시립묘지를 마주 보는 곳에 있습니다. 처음에는 무섭기도 하고 비라도 오는 날엔 더욱 으스스한 데다가 어둑어둑해지면 뭔가가 붙잡을 것 같아서 오싹하기만 했었죠. 어쩌다가 공동묘지 앞까지 왔을까, 하는 마음에 너무나도 서글펐습니다. 하루는 점심식사 후에 커피를 한 잔 마시다가 습관처럼 밖을 바라봤습니다. 문득 몽실몽실 여인의 가슴으로 보이는 봉분이 그리 아름다울 수가 없었습니다.
40여 년 전 그 여인의 가슴이 왈칵 떠오릅니다.
1970년대, 그러니까 큰딸 아이가 세 살 때쯤 대나무로 짠 크고 작은 소쿠리를 머리에 잔뜩 이고 빨강, 파랑, 노랑, 초록, 하양으로 물든 앙증맞은 아이들 소꿉놀이용 오색 바구니를 손에 든 소쿠리 장사 아줌마가 우리 집에 자주 다녔습니다.
어느 무더운 한여름 뙤약볕에 아줌마의 얼굴은 벌겋게 익었고, 윗도리로 입은 베적삼은 양옆으로 벌어진 채 잔뜩 불은 젖이 흘러나와 땀과 함께 푹- 젖어 있었습니다. 냉수에 미숫가루를 타서 건네고는 작은 바구니를 하나 사서 딸아이 손에 쥐어주었습니다. 부득이 그냥 준답니다.
“아줌마, 빨리 팔고 맘마 기다리는 아가한테 가야죠.”
내 말에 벌건 얼굴보다 더 붉은 눈물이 눈가에 어렸습니다.
몇십 년 전 일이 갑자기 무덤에 오버랩되어 퉁퉁 불은 힘찬 젖가슴으로 보이면서 소쿠리 아줌마 생각이 났습니다. 그 순간 무덤이 젖줄기로 생명의 샘으로 보입니다. 뭔가가 다시 살아나 약동하는 기분입니다. 그 무서움, 기피증, 싹- 없어졌습니다.
이름 모를 풀꽃들, 진달래, 벚꽃, 개나리…… 각양각색의 꽃들이며 감나무, 대추나무…… 무성한 나무들, 뻐꾸기, 부엉이, 까치, 까마귀…… 새들이 종일 이 나무, 저 나무로 옮겨 다니며 노래자랑하듯 지저귑니다. 무척이나 조용하고 공해가 없습니다. 이장해나간 무덤들을 일궈 토마토, 오이, 고추, 배추, 옥수수, 상추, 깻잎 등의 채소들을 근처 동네 사람들과 더불어 호성조형연구소 윤 사장도 농사를 짓습니다. 점심 먹고 어슬렁거리며 올라가 말을 붙이면 그냥 따가라 합니다. 내 생전 처음 따 보았습니다. 점심때 물로 대강 씻어 상추쌈 크게 싸서 입에 넣으며 무덤을 봅니다. 저분들도 옛날에 이렇게 먹고살았겠지요.
내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조용한 무덤. 만 가지 생각에 머리가 복잡한 사람에게는 좋은 휴식, 진정한 쉼을 얻을 수 있는 소박한 침묵의 장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