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우리가 생각해줄 때 죽음은 깨어나 우리와 함께 지낸다.
기억 속에서 내가 생각하는 한 죽음은 살아 있는 것이다.”
- 영화 <파랑새>에서
어느 때고 밤비행기 소리가 들리면 생각나는 아기가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60여 년 전 6.25 전쟁과 1.4 후퇴를 겪으며 한강을 걸어서 건너갔습니다. 눈앞에는 온 집안의 짐을 다 실은 듯 커다란 소달구지가 가고, 그 달구지에는 솥단지를 비롯해 이불 보따리를 얹고, 그 보따리에는 할머니가 웅크려 들어앉았습니다. 힘든 소가 한 발짝씩 내걸을 때마다 한강의 얼음이 조금씩 깨지곤 했습니다. 얼음이 부서지는 소리가 꼭 유리 깨지는 소리 같아서 도망가고 싶었지만, 동생을 업은 엄마의 처네 끈에 묶여 있기도 했고 꽉 찬 전철 안처럼 피난민과 그들의 보따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앞으로 걸어야만 했습니다.
얼음 깨지는 소리와 달구지 굴러가는 소리뿐, 한강을 가득 메운 사람들은 모두 말이 없었습니다. 언제쯤인지 얼음 깨지는 소리가 끝나고 얼어붙은 단단한 땅을 밟았습니다. 누군가 인도해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깜깜한 밤에 그저 묵묵히 앞으로 걸어 나갈 뿐이었죠.
그때 멀리서 비행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소리가 가까워질 때쯤 하늘을 올려다보니 깜빡거리며 멀어지는 비행기의 뒷모습이 보입니다. 그렇게 밤비행기가 처참한 낭만을 일으키는 순간, 피난민 속에서 아기 울부짖는 소리가 났습니다. 보따리를 머리에 이은 채 쓰러진 엄마의 가슴팍 위에 있는데도 아기는 소리를 지르며 울고 있습니다. 3살이나 되었을까. 오직 나만 아기를 바라보고, 오직 나만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는 것 같았습니다. 나 역시도 아직 어린 8살. 어른들은 못 들었는지 안 보이는지 크게 우는 아기를 소리 없이 지나쳐 갑니다.
깊은 겨울에 보았던 그 아기를 누군가 안아주었더라면 지금 어딘가에서 행복한 할머니가 되었을 텐데. 밤비행기 소리가 들릴 때마다 내 기억 속에서 그 아기가 되살아납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한 그 아기는 여전히 살아서 큰 울음소리를 낼 테죠.
라디오에서는 5월의 여왕이 떠나가니 아쉽다고 전하고, 휴대폰에서는 지인이 보내준 피천득의 시 <5월>에서 ‘5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21살 청신한 얼굴’이라는 구절이 뜹니다.
누군가의 희생 없이 ‘나’, ‘내’가 존재할까요. 사이렌 소리에 맞추어 국립묘지를 향해 고개를 숙입니다. 풍요 속의 사막과도 같은 지금 세상은 앞으로 또 어떻게 변할까요. 휴일이라고 청춘남녀들 손에 손을 잡고 아이스커피 하나씩 들고 강남역 신호등 앞을 피난민같이 가득 메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