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포터

# 36

by 김경옥

이야기 첫 줄을 쓸 땐 언제나 목적지를 정하지 못한 여행자처럼 가슴이 떨리고 설렌다는 독신녀 미스 포터는 칠 년째 카드를 그려서 팔고 있습니다.


필통을 열고 연필을 꺼냅니다. 그리고 천천히 연필을 깎습니다. 파란 수채화물감을 붓에 묻혀 스케치북에 천천히 줄을 긋습니다. 깨끗한 컵 투명한 물속에 붓을 넣으니 물이 빠르게 바다색으로 변합니다. 토끼를 그려 예쁜 단추가 달린 조끼를 입힙니다. 그녀의 눈에는 토끼가 조끼를 입고 즐겁게 뛰노는 모습이 보입니다. 개구리를 그리면 개구리가 붓을 잡아끌며 재주를 부립니다. 동물들을 그리며 여러 가지 옷을 해 입히고 모자를 씌우며 엄마, 아빠, 동생이 한 집에서 즐겁게 사는 것을 그립니다. 미스 포터는 늘 자기가 그린 동물들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약이 오를 정도로 작품들과 친합니다. 농장에 빛이 찬란한 것이 보이기에 정신없이 그리다 보니 돼지 밥통이었습니다. 작가의 눈에는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발견입니다.


나는 그 끝없는 힘찬 열정과 재능에 박수를 보내며 한 시 한 편을 들려주고 싶습니다. 시마(詩魔)는 시의 귀신입니다. 어느 순간 시인에게 시만 생각하고 시만 짓게 합니다. 시마가 한번 붙으면 다른 일에는 하등 관심이 없고 오로지 시에만 몰두하게 됩니다. 시마는 시인에게 즐거운 괴로움을 선사하는 모순적인 존재입니다. 작가라는 이름이 붙은 모든 사람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귀신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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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포터는 결혼 적령기를 훌쩍 넘기고, 또한 여자가 글을 쓰는 것을 기피하던 시절에 동물 그림에 빠져 동화책을 끊임없이 출간했습니다. 다 늦게 결혼을 결심한 남자의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도 더욱 열심히 동물들의 가족사를 재미있게 사랑스럽게 그렸습니다. 동서양이 멀리 떨어져 있었건만 시대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미스 포터에게 시마 같은 동물의 귀신이 붙었었나 봅니다. 소리 없이 찾아온 따스하고 설레는 봄볕 아래 화구를 펼쳐놓고 개구리에게 모자를 씌우고 넥타이를 매어주는 그녀에게 시마에 의해 썼다는 옛날 시인 이현욱의 시를 한 편 선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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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음걸이 느리지도 바쁘지도 않건만

동서남북 온통 모두 봄빛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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