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옛날에는 그 계절이 오기 전에는 못 먹는 음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계절별로 제철 따라먹는 맛이 있었고 그때가 아니면 구하지 못했기에 귀하게 여기기도 했습니다. 요즘은 대형마트에 가면 지금이 어느 계절인지 모르게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과일, 채소 등등. 기다림이 없으니 귀한 것이 없습니다. 사계절이 한 군데 모여 그리 반갑지도 먹고 싶지도 않습니다. 싱거운 풍요(?)입니다. 지난 계절의 양분을 가득 담아 알이 꽉 찬 제철 음식이 있습니다. 영화를 한 편 봐도 뒷맛을 이어주는 음식이 있고, 책방에 가도 수많은 책 속에 제 계절에 맞는 책이 있습니다. 이렇듯 읽고 듣고 보는 것도 시간을 때를 탐합니다.
언제부턴가 꿈꿔왔습니다. 사계절에 맞는 각각의 책을 골라 가방 가득히 넣고 딱 1년만 떠나고 싶다는 것입니다. 눈 뜨면 시간별로 먹어야 되는 약봉지들, 탁상용 달력에 표시되어 있는 모두 하기 싫은 일거리들. 특별한 이유 없이 부산스러워지는 이곳에서 멀리 떠나고 싶었습니다. 여기서 더 살려면 컴퓨터와 스마트폰의 복잡한 작동법을 알아야 된다는 것, 냉장고 문을 열고 오늘은 또 무엇을 만들어 먹나 고민해야 한다는 것. 나를 옥죄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딱 1년만 지내고 싶었습니다.
가곡 ‘봄처녀’에서처럼 봄처녀와 더불어 봄꽃을 보며 따스한 봄볕 아래 봄나물을 캐어 맛있게 먹습니다. 밤엔 꽃향기 살랑살랑 들어오는 창가에서 꿈꾸듯 봄의 책을 읽습니다. 여름엔 보이는 것이라고는 반짝거리는 푸른 바다, 하얀 모래바닥에 앉아 수평선 끝까지 멋있게 천천히 헤엄쳐 나가는 나를 바라보고 싶습니다. 밤에는 파도 소리에 맞추어 크게 낮게 소리 내어 책을 읽습니다. 가을에는 끝없는 자작나무 숲길을 걷습니다. 소리라고는 내가 밟는 떠나가는 낙엽 소리뿐, 그 낙엽의 이야기를 기억하며 눈을 한참 감고 있다가 다시 뜨며 조용히 책을 읽습니다. 풀벌레 소리가 효과음입니다.
하얀 눈의 나라인 노르웨이를 본 적이 있습니다. 두꺼운 얼음을 깨고 싱싱한 물고기를 잡아 나무 냄새도 그윽한 석쇠에 구어 좋은 와인 한잔에 두툼한 빵을 잘라 저녁을 먹고는 투박한 오두막집 난롯가에 모여 앉아 옛이야기의 꽃을 피웁니다. 신비스러운 자연의 이야기, 지혜롭게 살다 간 선조들과 용감하게 이곳을 지켜온 사람들의 이야기들. 장작불에 비추인 그들의 얼굴은 흥미로움에 행복해 보입니다. 끝내는 제 몸 태워 헌신하는 나무들. 난로 가득히 뿜어내는 그 불꽃들은 둘러앉은 사람들 얼굴에 용기와 희망을 주는 것 같습니다. 밖에는 아가 주먹만 한 함박눈이 소복소복 내립니다. 난 가만히 그곳에 앉아 그들의 이야기, 겨울의 책을 읽습니다.
봄의 노래를 듣습니다. 수채화로 그린 봄의 동산은 깨끗하면서 아름답습니다. 봄이 가득한 시집을 읽습니다. 마음속에 가슴속에 나의 딱 1년은 이루어져 가는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