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모르는 길을 찾다

#70

by 김경옥

버스를 타고 반포대교를 건너갑니다. 올여름 폭염 속에 강물은 뜨거움을 피하듯 빠르게 흘렀는데, 초가을로 넘어가자 조용히 침착하게 흘러갑니다. 한 해가 또 술렁술렁 가는구나, 하는데 언뜻 영화 <디 아워스>의 한 장면이 보입니다.


소설을 쓰다가 양쪽 점퍼 주머니에 돌을 가득 넣고 강물로 들어간 여인, 남편과 어린 자식을 헌신짝같이 버리고 급한 듯 집을 나간 단발머리 로라, 허무한 파티에 빠진 클라리사.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세월≫과 ≪델러웨이 부인≫을 변주하여 1920년대 영국에서 1990년대 미국까지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세 여인을 번갈아 묘사하는 통에 잠시 어리둥절했었습니다.


“얘, 이런 영화 보고 나선 양식(?)을 먹어야 돼. 그래야 영화 속 맛이 이어지지. 전에는 <마농의 샘>을 보고 설렁탕을 먹자는데 기분이 영 아니더라. 영화 한 편에도 맛이 있어. 무엇을 먹느냐가 영화 뒷맛과 이어져.”


영화가 끝난 후 삶의 길을 생각하며 이유 모를 아쉬움과 쓸쓸함을 안고 후배와 버거킹 문을 열었습니다. 창작의 고통 때문에 정신병이 재발하여 남편에게 미안해서 떠난다는 버지니아 울프의 울부짖음은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단발머리 여인 로라는 가정밖에 모르는 착한 남편 버리고 끝내는 아들 리처드까지 창문에서 떨어져 자살하게끔 하는 원인을 제공하고도 “왜?” 하고 묻는데 나도 모른다고 합니다. 후배와 나는 “자식을 낳았으면 책임을 져야지” 하며 햄버거를 입에 가득 넣었습니다.


우리는 한참 결혼생활 중에 작품생활을 하면서 여기저기서 시달릴 때였습니다. 단발머리 여인 로라에 대한 내 마음은 후배가 알 것이고 후배 마음은 내가 알 것 같았습니다. 둘이 팔짱 끼고 아무 말없이 걷다가 지하도가 보이는 앞에서 헤어졌습니다.


“이곳으로 들어가셔서 마주 보이는 대로 나가시면 바로 언니네 집으로 가는 버스가 있어요.”

“알았다. 걱정 말거라. 잘 가. 안녕.”


모처럼 만났던 후배에게 아쉬운 인사하고 지하도로 내려가는데 앞이 타일 벽으로 막혔습니다. 순간 당황스러웠지만 벽을 따라 걸어서 첫 번째 층계로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막다른 곳입니다. 버스정류장에 서 있는 사람들도 이방인으로 보입니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다 모르는 건물입니다. 어스름했던 빛이 컴컴해지더니 금세 깜깜한 밤으로 바뀌어 불빛들이 휘황하니 더욱 아찔했습니다.


다시 지하도로 내려갔다가 올라왔습니다. ‘설마 치매?’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 침착이야. 정신 차려!’ 길 건너 마주 보이는 건물을 뚫어지게 쳐다보니 앞쪽도 오른쪽도 낯설기만 했습니다. ‘왼쪽 건물도 아니면 택시를 타야지’ 마음을 달래며 고개를 돌리니 ‘어머머!’ 거기에 낯익은 건물 간판, 사람들, 버스들. 그때 내가 다시 살았다는 기쁨에 얼마나 또 마음이 쿵쾅거렸는지… 무사히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니 기사님도 멋있어 보이고 승객도 모두 어여뻐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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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씻고 누웠습니다. 아까의 사건을 생각해봅니다. 떠올랐던 영화의 사연들도 한 장면 한 장면 음미해봅니다. 그들의 선택은 최선이었을까… 시간이 가면서 모든 것이 점점 흐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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