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사랑

# 8

by 김경옥

소녀 시절에서 여자로 막 넘어서면서 만난 남자가 ≪빨강머리 앤≫에 나온 길벗입니다. 앤을 바라보는 눈빛, 마음속 이야기를 다하지 못하면서도 앤과의 관계를 이끌어가는 모습을 상상하며 즐겁게 읽었습니다. 후에 영화에서 길벗으로 나온 남자 배우의 얼굴은 아주 평범했지만 나만의 길벗은 얼굴보다도 배려하는 자상한 마음에 있었습니다. 영화 <하이 눈>, <OK 목장의 결투>, <황야의 무법자> 등에서 말 잘 타고 총 잘 쏘는 용감무쌍한 정의로운 남자들, 사랑을 위해 죽은 젊은 베르테르, 남을 위해선 의사가 되고 나를 위해선 시인이 되고 싶다던 닥터 지바고, 안개보다 더 가라앉은 목소리로 자신의 안위와는 관계없이 여인을 떠나보내는 카사블랑카 릭은 그 시절의 나를 황홀하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책이나 영화 속에서 ‘어머머 이런 남자, 내가 좋아하는 남잔데!’ 하며 반해버린 남자들입니다.


≪앵무새 죽이기≫의 애티커스 핀치 변호사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용기가 무엇인지, 직업에 따른 책임감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영화에서는 그레고리 펙이 그 역할을 맡아서 나를 더욱 신나게 했었죠. 신중하며 깊이 있는 그레고리 펙의 얼굴인 변호사 애디커스 핀치, 그의 와이프는 이 잘난 남자 두고 어떻게 천국에 갔을까요. ≪그리스인 조르바≫에서는 조르바의 대사만 나오면 ‘아! 시원해, 오우 시원해!’ 하며 밑줄 긋던 생각이 납니다. 영화에서는 앤서니 퀸이 조르바였죠. 두려울 것도 안 될 것도 미련을 둘 것도 인생에 걸림돌이 될 것은 하나도 없는 듯 거침이 없습니다.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다 진리(?)입니다. 슬플 때 팔과 다리를 날개를 펼치듯 모래사장에서 가볍게 추던 특유의 춤, 악기 산토리를 보자기에 소중하게 쌀 줄도 아는 부드러운 남자, 의지하고 싶은 남자입니다.


종로에 있는 숙명여중고를 다닐 때 화신백화점, 신신백화점을 지나 전차를 타거나 아니면 종로 5가에 있는 충신동 우리 집을 갈 때는 걸어갈 때도 있었습니다. 하루는 친구와 영화 주인공들이 키스하는 장면을 이야기하는데, 팔짱을 꼬옥 끼고 속삭이듯 "그 둘이 에스에스아이케이 하려고 했어", "어머? 에스에스아이케이?"라고 종알대며 종로 사거리를 부끄러움에 떨며 걸었습니다. 그때는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19세 이상, 미성년자 불가에 해당되는 일이었습니다. 아! 지금 생각해보면 얼마나 순수의 시대였나, 가슴이 아련해집니다.


시간은 쉴 새 없이 흘러가 어느덧 인생의 깊은 겨울에 와 있습니다. 그런데 남자가 또 생겼습니다. 지금까지의 그 많은 남자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남자.


우유 한 통을 입에 물었다 하면 단숨에 쭉 빨아먹고, 트림도 거창하게 끄륵 합니다. 나와 눈이 마주치면 함박같이 웃습니다. 함박꽃 본 지 꽤 오래됐는데 그 꽃이 웃는 모습은 나를 통째로 꽃 속으로 들어 앉히고, 꽃잎으로 팍 덮는 아득함입니다. 구름보다 더 부드러운 피부, 단풍잎 같은 모습의 아주 작은 포동포동한 손, 곰발바닥 같은 두툼한 발, 뻐꾹새 소리를 닮은 딸꾹질, 어미 소가 새끼 소에게 말을 하듯이 혼자 말하는 감미로운 옹알이, 하품할 때 열리는 입 속은 활짝 핀 나팔꽃을 들여다보는 듯 신비롭습니다. 얼굴이 벌게지고 두 눈이 사시가 되어가면 힘주는 소리가 납니다. 가뜩이나 납작한 코가 힘을 주면 볼따구니 사이사이에 끼어 보이지 않습니다. 데굴데굴하게 똥을 누었을 때는 똥도 예쁘기만 합니다. 난 복이 많습니다. 계절의 끝자락에서 똥도 예쁜 남자를 만났으니.



하루에도 서너 번 "사랑해요" 하며 허연 머리를 가슴으로 밀어 넣으면 간지러운지 까르르 웃고는 젖 먹은 힘을 다하듯이 머리카락이 빠지도록 잡아당깁니다. 아아 아프다는 생각과 손 힘이 세서 좋다는 생각이 겹칩니다. 이런 소리를 하면 벌써 대학생 손자, 손녀들이 있는 친구들은 가만히 웃기만 합니다. 손자와 나는 70여 년이라는 길고 긴 거리가 있습니다. 시간을 의식하고 세월의 눈금을 짚어보며 빨리빨리 사랑해주고 떠나야 하는 사랑입니다. 외출에서 돌아오는 할아버지를 반기는 그 얼굴은 캄캄한 밤, 끝없는 바다를 지키는 등대의 빛처럼 반짝반짝거립니다. 찬송가 ‘하나님의 진리 등대 길이길이 빛나리’ 생각이 납니다. 등대 같은 삶을 살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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