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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옥 Mar 20. 2018

오늘도 햇살처럼

# 여는 글

오늘 글을 읽고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사람 좋아하시는 외할머니 댁은 객식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일찍이 혼자되신 외할머니의 큰어머니를 비롯해서 늘 화롯가에서 바늘과 인두를 들고 계셨던 성북동 할머니는 내가 서너 살 때 색동으로 복주머니를 얌전하게 만들어주시기도 했습니다. 높은 천장과 부뚜막이 시커멓게 그은 바닥 깊숙한 부엌에서 그 많은 밥을 짓던 정애 언니, 봄이면 황해도에서 오신다는 젓갈 아줌마는 마포나루터나 인천에서 새우젓과 조개젓을 받아다가 머리에 이고 하루 종일 이 집 저 집 “조개젓 사세요.” 목이 휘도록 장사를 하고 저물녘 할머니 댁에 들어와 부엌일도 도와주고 방마다 군불도 때어주고 집도 치워주며 숙식을 했습니다.


외할머니는 낮에 심부름하는 아이에게 놋주발 뚜껑을 들려 지금의 성균관대학교 앞에 있는 책방으로 보내셨습니다. 밤이면 누구누구 할 것 없이 외할머니 방에 모여들어 놋주발 뚜껑을 맡기고 빌려온 ≪춘향전≫, ≪심청전≫, ≪옥루몽≫ 등을 읽어주는 외할머니의 책 읽는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이웃집 아주머니들도 마을(마실)을 와서 합세합니다.


밤이 깊어갈수록 한숨 쉬는 소리, 아휴 불쌍해, 이 녀석 좀 봐라, 못된 놈 하는 효과음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옵니다. 노처녀는 남자 주인공이 내 남자인 양 설렘에, 이별의 슬픔에, 속을 볶아대며 가슴 아파했겠죠. 젓갈 아줌마는 구박하는 시어머니에 흥분해 분노하고, 혼자되신 분들은 나름대로의 외로움을 달래셨을 테고, 모두 자신의 처지에 빗대어 울고 웃고 했겠죠. 바깥세상을 모르는 여인네들의 세상 나들이입니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좀 배웠겠죠. 어쩌면 세상눈이 떠지고 생각이 자라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젓갈 아줌마는 늦가을이 되면 동대문시장에 가서 광 목을 필로 사서 머리에 잔뜩 이고 황해도 고향으로 갑니다. 냇가에서 깨끗이 빨아서 솜을 켜켜이 넣고 식구들의 옷을 만들었겠죠. 봄내 여름내 고생한 것은 다 잊어버리고 애틋한 마음, 사려 깊은 마음, 정직한 마음으로 식구들 뒷바라지에 최선을 다하셨을 것입니다.

끝내는 다 잘되는 이야기에 자기가 잘된 양 한시름 놓는 그러한 글을 읽고 조각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빨랫줄에 널어놓은 하얀 광목처럼 깨끗하고 따뜻하고 수수한 작품을 만들고, 그것을 글로 썼으면 좋겠습니다. 책을 귀로 듣던 그 방 안의 모든 분이 다 잘되는 그런 글을 읽고 만들고 싶습니다.


화롯가에 모여 앉아 잿더미를 헤쳐가며 옛날이야기가 한창입니다. 밖에서 부는 바람은 문풍지를 흔들며 처마 끝 풍경 소리의 높고 낮음을 들려줍니다. 효과음입니다. 무서운 이야기는 대숲을 흔드는 소리, 자연의 소리에 더욱 무서워집니다.


곡식은 땅을 태양을 비를 의지합니다. 연인들은 사랑을 의지합니다. 아가는 엄마를 의지합니다. 글은 글을 의지합니다. 따뜻한 화롯가 앞에서 듣던, 끝내는 모든 것이 잘되는 아름답고 정직한 글을 읽고 쓰고 만들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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