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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률 Jan 17. 2023

저는 따로 먹을게요

요즘 사람을 외향형(E), 내향형(I)으로 구분하곤 하는데 나는 혼자 있을 때 에너지가 충전되는 내향형 인간이다. 그러다 보니 하루 종일 일도, 식사도 회사 사람들과 같이 하 보면 심신(心身) 배터리가 뚝뚝 떨어진다. 출근한 순간부터 배터리는 떨어지고 거래처로 출근한 날이면 그 속도가 배가 된다. 그래서 혼밥을 좋아한다.


계약서상 회계사가 '갑'인 경우는 없지만 거래처 담당자님들은 손님맞이 겸 회계사들의 식사를 챙겨주시곤 한다. 회사와 자주 간 식당 1위는 쌀국숫집이다. 면, 밥, 고기, 해산물, 매운맛, 순한 맛, 국물, 볶음 등 다양하게 각자 한 그릇씩 먹을 수 있고 깔끔하게 낱개로 나눠 먹을 수 있는 사이드 메뉴가 있어서 쌀국숫집이 아마 서로 제일 무난한 곳인 것 같다. 


이렇게 식당을 고를 때부터 고민이 필요한 만큼 이 식사 자리는 그다지 편하지 않다. 수저를 놓는 손이 서로 엉키고 물컵과 물통을 동시에 다른 사람이 잡는다. 누가 물을 따를지 왔다 갔다 하다가 한 사람이 물을 따르고 다른 사람은 물을 받는 어색한 장면이 연출되기도 한다. 


일 관련된 이야기가 슬쩍 나오기라도 하면 서로 행간을 읽기 위해 집중해야 한다. 회계법인과 거래처의 각 윗전까지 모였을 땐 서로 접대하려고 애쓰는 자리가 된다. 내가 이런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있기 위한 요령이라곤 술을 빼지 않고 마시며 텐션을 높이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도 술이 없는 점심시간에는 무용지물이다. 


마음 같아서는 항상 핑계를 대고 혼자 먹고 싶지만, 나는 거절하는 게 훨씬 불편해서 거래처와 식사 자리는 웬만하면 참석한다. 아마 거래처에서는 회계사들이 다 일정이 있어 따로 먹는다고 하길 바랄 것 같긴 하지만.




혼자 먹는 게 더 편한 건 식사 속도 때문이기도 하다. 팀원들은 대부분 남자이고 고객사도 남자가 더 많은데, 학생 시절에 급식을 빨리 해치우고 축구하던 습관 때문인지 남자분들은 정말 빨리 먹는다. 그 속도에 맞춰 오랫동안 회사 밥을 드신 여자 담당자님들도 빠르긴 마찬가지다. 회의실에서 급식실로 내려가서 배식받고 앉아서 식사하고 커피를 사서 회의실로 다시 올라올 때까지 보통 25분 정도가 걸렸다. 


보통 직장인에게는 충분한 시간일 수 있지만 원체 느리게 먹던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난 주변 분들 속도를 체크하면서 배도 채우고 맛있는 반찬을 남기지 않으려고 눈과 손을 항상 바삐 움직였다.


뉴스탭 시절 어느 날 구내식당에서 소시지 핫도그가 후식 메뉴로 나온 적이 있다. 습관적으로 후식을 마지막으로 미뤄두었는데, 다른 분들이 모두 식사를 마치고 날 기다리고 있는 바람에 핫도그를 통째로 남겨야 했다. 그 이후로는 본식, 후식 상관없이 맛있는 메뉴부터 먼저 먹는다. 


팀원들이 빨리 먹으라고 강요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열 명가량의 회계사와 고객사가 모두 수저를 내려놓은 채 나만 바라보고 있을 때 꿋꿋하게 더 먹을 배포가 나는 없다. 


아마 그분들은 빨리 먹고 쉬거나 일할 시간을 더 만들고 싶었던 것 같다. 나도 다른 분들의 계획에 협조하고 싶었지만, 해가 지나도 속도엔 한계가 있어 요즘엔 그냥 요령껏 허기만 달래고 적당하게 식사를 마치곤 한다. 




야근이 잦은 곳이라면 회사에서 점심뿐만 아니라 저녁도 먹을 일이 많다. 나는 충실한 내향인답게 저녁 먹을 시간 즘이면 집중력과 체력이 고갈된다. 저녁 이후에 일을 하더라도 집이나 카페에서 혼자 했으면 좋았겠지만, 막내 시절 나에겐 선택권이 없을 때가 더 많았다. 


다 같이 모여 밤까지 일을 해내려면 저녁 식사만큼은 혼자 하며 에너지를 충전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게 샐러드 먹기였다. 왜 샐러드냐면, "저는 다이어트 때문에 샐러드 먹으려고 하는데 같이 드실 분 계세요?"라고 하면 어른들은 "그걸로 밥이 돼?"라며 국밥을 드시러 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취하면서 신선한 채소와 양질의 단백질을 고르게 먹을 수 있는 샐러드는 나에게 일부러 찾아 먹기도 하는, 국밥만큼 든든한 한 끼이기도 했다.


솔직하게 혼자 먹겠다고 하면 정 많은 어른들은 왜 혼자 먹냐며 같이 먹자고 데려가시고, 따로 먹고 싶은 메뉴가 있다고 하면 그럼 다 같이 그거 먹으러 가자고 하시니 샐러드는 혼밥 할 수 있는 수단으로 제격이었다. 추가로 간간이 마라탕도 써먹었다. 남초 집단에서 불호가 없는 메뉴가 돈가스라면 불호가 대부분인 메뉴가 마라탕이다 보니.




내가 막내일 때는 팀에 '따밥(따로 먹기)' 문화가 없었다. 팀의 첫 90년대생이었던 나는 그걸 모르고 근처에서 야근하는 동기들과 저녁 약속을 자주 잡았고 파트너님이 밥 사 줄 테니 먹고 가라 할 때도 선약이 있다고 거절하곤 했다. 그래서 "파트너가 밥 먹자는데 약속 있다고 따로 먹겠다는 뉴스탭은 처음 본다”라는 말을 선배에게 듣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항상 같이 먹어야 한다는 분위기는 없어졌지만, 그전까지 나는 야근을 열심히 하기 위해 '따밥'할 수 있는 핑계를 항상 대야 했다. 


팀원들과 서로 근황을 물어보고 커피 내기 사다리 게임을 하는 시간도 물론 좋다. 팀원들이 천천히 먹으라고 한 마디씩 해줄 때면 마음이 따뜻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혼자 먹는 게 점점 더 편해지고 있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직장에서 점심을 혼자 드신다는 얘길 들었었다. 어린 마음에 아버지가 따돌림을 당하시는 건지 걱정되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자기 시간을 온전히 즐기고 있었던 거다. 어린이들도 유치원에서 반찬 투정 없이 바르게 먹느라 힘들었으니 집에서는 마음대로 먹겠다고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밥 먹을 때만큼은 잠시 사회생활을 내려놓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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