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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률 Jan 10. 2023

여보세요?

"바쁘신 듯하여 메일 남깁니다." 내가 애용하는 이메일 서두다. 이메일보단 전화로 얘기할만한 용건이지만 통화할 용기가 도저히 안 날 때, 나는 통화 버튼을 누르고 '제발 받지 마라, 받지 마라' 주문을 외운다. 그리곤 신호음이 세 번 울릴 때까지만 기다렸다가 바로 끊고, 미리 써둔 이메일 전송 버튼을 눌러버린다.


동료 회계사들은 이 얘기를 들으면 인생 어렵게 산다며 놀린다. 맞는 말이다. 인생 살기 참 어렵다.




요즘 어린 세대들은 어려서부터 전화 통화보단 메신저에 익숙했다고 한다. 나는 그런 세대가 아니고 친구와 놀고 싶으면 친구 집으로 전화해서 "여보세요, 김미영 친구 김률인데 지금 미영이 집에 있나요?"라고 친구 부모님께 예의 바르게 여쭈어야 했던 세대다. 그런데도 어쩌다 전화가 무서운 어른으로 커버린 건지 모르겠다.


어릴 때 자장면을 주문하려면 전화해서 우리 집 주소와 메뉴를 불러야 했다. 나는 긴장되어서 종이에 대사를 미리 적어놓곤 했다. 지금도 배달 앱이 없었다면 주문할 때마다 두세 번 연습한 다음에 전화를 걸었을 것이다.


일할 때도 비슷하다. 물어봐야 하는 내용, 요청해야 하는 내용뿐만 아니라 상대방이 전화를 받으면 뭐라고 말을 시작할지 대사도 적어둔다. 뉴스탭 때는 “XX회계법인 김률입니다.”보다 “여보세요”가 입에 더 붙어서 전화 걸기 전에 먼저 몇 번 중얼거리기도 했다. 




회사에서 하는 통화는 읍소나 독촉, 해명이나 사과같이 불편한 내용을 자주 담고 있다 보니 더 불편한 감이 있다. 거래처에 독촉이라도 해야 할 때면 나 같은 쫄보는 벌벌 떨면서 허공에 대고 굽신거리며 미리 준비한 대사를 읊는다. (계약서상 감사인은 ‘을’이다.)


그러다 옆을 보면 입사 동기인 남자친구 김 군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거래처 담당자님과 수다를 떨고 있다. “안녕하세요 과장님, 애기 운동회는 잘하셨어요?”에서 시작하는 수다를 10분 넘게 이어가다가 “아유, 바쁘시겠다. 그런데 저희 것도 해주셔야 하는데 어떡해요? 저희도 급한 거 아시잖아요” 로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김 군이 저렇게 통화할 수 있는 게 김 군의 붙임성 덕분인지 거래처 담당자 덕인지 모르겠다. 내가 함께 일했던 담당자님들은 평소보다 전화할 때 더 무뚝뚝했다. 내가 용건을 시작하기 전에 "안녕하세요 대리님. 식사는 하셨나요?"라고 안부 인사부터 한 적이 있는데 그때 대리님이 차갑게 "네."라고만 답했던 적이 있다. 


‘혹시 내가 바쁜 때에 눈치 없이 전화했나, 당연히 식사했을 시간인데 괜한 질문을 했나, 양치하러 화장실 가는 길에 받으신 건가, 내가 저번에 밉보인 게 있었나?’


“회계사님도 식사 잘하셨나요?”라고 되물으면 뭐라고 답할지 미리 준비해 놨던 나는 “네.”에서 끊긴 대화에 당황해서 버벅대며 용건을 꺼냈었다. 살가워 보려고 했던 노력이 거절당하고 나니 이후에 한동안 대리님과 통화할 때마다 더 긴장하게 되었다.




뉴스탭 때 전화를 제일 많이 했던 곳은 은행이었다. 기말감사 때 은행이나 증권사 같은 금융기관에 감사인이 직접 연락해서 회사가 얼마를 예치해 놨는지, 대출은 얼마나 있는지, 주식은 얼마를 사놨는지 조회하는 절차가 있다 (금융기관 외부조회). 요즘에는 온라인으로 대부분 조회가 가능하고 대형 회계법인에는 조회서 발송을 대리해 주는 팀이 따로 있지만 내가 뉴스탭이었을 때는 감사인이 은행에 직접 전화를 돌려서 주소를 확인하고 우체국에 가서 우편 발송도 직접 했다.


"안녕하세요, XX회계법인 김률입니다."라고 운을 띄우며 전화를 처음 걸었던 때가 아직도 생각난다. 어려운 내용을 설명해야 하는 전화도 아니었는데 어찌나 떨리던지. 주소를 받아 적고 물어볼 거리를 다 물어봤는지 미리 적어둔 종이를 대충 훑어본 후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직후에 '아, 맞다. 담당자님 성함 안 여쭤봤다.'라고 탄식했었다.




인차지를 하기 전까지는 회의실에서 전화를 받지 않고 노트북을 들고 희의실 밖 복도 어딘가로 나가서 받곤 했다. 선배 회계사들이 조용히 각자 일에 집중하고 있는데 거기서 버벅거리며 멍청한 말을 뱉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두가 모인 사무실에서 내선전화기로 업무를 보는 거래처분들이 항상 대단해 보였다.


이제는 다 들고 나가는 게 더 귀찮은 연차가 되었다. 여전히 ‘을’의 입장에서 벌벌 떨긴 하지만 (계약서상 회계법인은 항상 ‘을’이다) ‘에라 모르겠다’하는 마음가짐을 얻기도 했다. 오늘도 이메일을 쓸지 전화를 걸지 고민하다가 ‘하나, 둘, 셋'을 센 후 통화 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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