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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률 Feb 01. 2023

하나를 배워도 둘을 몰라

회계법인은 9월이 공채 시기이다. 이때 합격한 이들이 각자 졸업이나 여행 일정에 맞춰서 9월 또는 12월 중에 입사한다. 나는 감사본부 소속으로 9월에 입사했다. 첫 필드(*1)는 울산에 있는 여러 공장 중 하나였고 첫 업무는 그 회사의 중간감사였다.


분명 CPA 2차 시험 과목 중에 '감사(Audit)'가 있었고 나는 감사 과목을 한 번에 합격하지 못해서 시험을 두 번 봤다. (CPA 2차 시험은 불합격한 과목만 다음 연도에 재도전할 수 있는 유예 제도가 있다.) 공부를 두 번 했지만 내가 처음으로 해야 했던 ‘중간감사’가 무슨 일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아마 인차지(팀장, 현장책임자)가 업무에 관해 설명해 주었을 텐데 그땐 내가 매일 타던 버스도 낯설었던 뉴스탭 때라 그 설명이 이 설명인지 아마 이해를 못 하고 있었을 거다. 내 첫 인차지는 박 이사님이었다. (당시엔 이사 직급이 아니었지만.) 박 이사님은 나보다 연차가 7년 이상 많았고 이듬해에 특진할 만큼 똑똑한 회계사였다. 이사님은 너무 똑똑해서 1년 차 눈높이에 맞춰 설명을 못할 때가 종종 있긴 했다. 




난 내가 뭘 하러 가는지도 모르는 채 울산행 KTX를 타러 서울역에 약속 시간보다 40분 일찍 도착했다. 요즘도 서울역에 가면 그날이 생각나곤 한다. 나는 시간을 때우기 위해 어슬렁거리다가 롯데리아에 들어가서 평소엔 먹지 않는 아침을 먹으며 사람 구경을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울산은 제조업 회사가 많아서 흔한 출장지였다. 그래서 그날 서울역에는 울산으로 출장 가는 회계사들이 각 법인에서 나와 있었다.


서울역에서 울산역까지 KTX로 2시간 반, 울산역에서 공업단지까지 택시로 30분 넘게 달려 필드에 도착했다. 공장 안에는 들어가 봤어도 그 안 사무실에 들어가 앉아본 건 처음이었다. 박 이사님은 회사 담당자님들에게 나를 새로 입사한 뉴스탭이라고 소개하며 인사시켰다. 나는 허둥대며 뻑뻑한 새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잘 부탁드린다고 인사드렸다.


인차지와 회사 담당자들은 결혼 준비는 잘 되어가는지부터 회사에 그동안 별일은 없었는지 담소를 나누었다. 경청해보려 했지만, 매출이 어떻고 거래처 채권이 어떻고 하는 얘기 중에 알아들을 수 있는 건 많이 없었다. 나는 귀를 열어놓은 채로 전기 조서(*2)를 열었다. 전날 밤에 미리 읽어보긴 했지만 와서 인사도 하고 회사 구경도 대충 한 상태에서 보니 또 다르게 읽혔다.




중간감사는, 본격적으로 기말감사를 나가기 전에 회사에 대해 미리 알아보는 예습 시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예를 들어 나는 회사가 급여를 지급하는 거래를 맡았는데, 회사가 급여 비용에 대한 회계처리를 어떻게 하는지 미리 파악하고 어떤 부서에서 어떤 순서를 밟는지 파악하고 이때 생기는 증빙을 순서대로 받으면 됐었다 (추적 절차, walk-through test).


이 회사는 우리 법인에서 몇 년째 담당하는 고객사였고 아까 담소에서 들은 바로는 올해 급여 쪽에는 변동 사항이 하나도 없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전기 조서의 작성일을 올해 날짜로 바꾸고 첨부 작년 증빙을 올해 새로 받은 걸로 바꿔 끼면 되었다.


오케이, 본격적으로 게임을 시작하기 전에 운 좋게 맛보기 단계부터 시작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업데이트만 하면 되는 것 같으니 일단 전기 조서에 적혀 있는 증빙 리스트를 나도 똑같이 요청해서 받았다. 이때 회계사로서 처음 했던 고민이 아직도 기억난다. 창피하게도 ‘품의서’가 무엇인지다.




전기 조서에 적혀 있길, 인사 담당자는 급여를 지급할 때 급여 품의서를 통해 팀장의 결재를 받는다고 했다. 지금은 품의서가 어디서나 쓰는, 검색만 해보면 뜻이 나오는 일반적인 서류라는 걸 알지만 그땐 어디 검색해 볼 정신이 없었다. 그 회사에서만 쓰는 특정한 서류인가 싶어 전임자인 옆자리 선배에게 품의서가 뭐냐는 바보 같은 질문을 했다.


여유로운 때였으니 망정이지 바쁜 겨울에 그런 질문을 했으면 정말 민폐였을 일이다. 그 선배가 동기 단체 메신저에서 “방금 뉴스탭이 나한테 뭐 물어본 줄 아냐?”며 내 험담을 했어도 할 말이 없다.


이 일이 있고 난 뒤 한동안은 모르는 게 있어도 선뜻 물어보질 못 했다. 당연히 알아야 하는 걸 모르는 건지 내가 물어봐도 되는 일인지 구분이 되질 않으니 동기들 단체 메신저만 열심히 들락날락했다.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과 창피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합해지니까 안 그래도 없던 말수가 더 줄어들었다.




3일 동안 이 파일 저 파일 열어보며 허둥지둥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무사히 마쳤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필드 철수일에 박 이사님이 나에게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회계사님은 인터뷰 안 하시네요?”

“아? 예. 예?”

인터뷰요? 제가 인터뷰를 해야 했군요? 공부할 때 감사(audit) 절차는 질문으로 시작해서 경청으로 끝난다고 배우긴 했지만 그걸 내가 이번에 해야 했던 건 줄은 몰랐다.


당시 회사에 변동 사항이 없어서 망정이었지, 매년 담당자와 정책이 바뀌는 회사였다면 나는 첫 거래처부터 ‘빵꾸’를 낼 뻔했다. 알고 보니 이미 전기 조서에 설명이 잘 적혀 있어도 인사 담당자를 불러서 작년에 비해 바뀐 절차는 있는지, 이미 파악한 대로 되고 있는 게 맞는지 물어봤어야 했다.


입사하고 좀 지났을 때 쓴 일기를 찾아봤다.

내일 시험인데 공부를 하나도 안 한 기분이다. 시험 범위가 뭔지도 모르겠다. (2016.11.08)


혼자 밤을 새워서라도 알아내야 하는 일이라면 그렇게 하면 되는데, 그러면 되는 일인지 아니면 누군가에게 요청해야 하는 일인지 구분하는 것부터가 막막했던 때다. 짬을 채우는 시간을 보내고 나니 자연스럽게 해결되었지만, 그전까지는 매 순간이 얼마나 긴장되던지.


(*1)
필드 (Field): 거래처. 고객사 회계팀이 있는 본사 사무실, 공장 등. 감사 대상 회사일 수도 있고 용역사일 수도 있다.
사용 예시: 필드 출근, 필드 일정 (필드에 나가기로 약속된 일정, 작은 기말감사 필드는 보통 2~3일), 필드 철수 (필드 일정을 마친 후 회사 담당자에게 인사하고 짐 싸서 나오는 것), 필야 (필드 야근), 다음 필드, 필드 뛴다, 필드에서 말했는데, 필드 몇 개야?

(*2)
조서: 내가 수행한 절차를 정리해 두는 문서. 감사인은 기준대로 적절한 절차를 모두 취했다는 증거를 남기기 위해 어떤 증빙을 확인했고 어떤 절차를 수행해서 결과가 어떻게 나왔는지 누가 봐도 이해할 수 있게 기록을 남겨야 한다.
전기 조서: 전년도에 전임자가 작성한 조서.
사용 예시) 조서 언제 쓰지, 조서 닦아야 해 (나만 알아볼 수 있는 버전을 조서를 누가 봐도 이해할 수 있게 예쁘게 업그레이드시켜야 해), 조서 올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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