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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률 Dec 29. 2022

8년 차 회계사, 아직 적응중

시험만 붙으면 되는 줄 알았다. 내 인생에서 이제 공부는 끝이고 시험도 없을 것이라 믿었다. 공인회계사 (KICPA) 자격증은 종종 ‘공인중개사’로 오해받긴 해도 문과에서 알아주는 전문직 자격증이니까 걱정 없이 먹고살 수 있을 줄 알았다.
  

2016년 가을에 빅펌(*1) 감사본부로 입사해서 6번째 시즌(*2)을 마치고 나니 2022년 3월이었다. 직장인에게는 3, 6, 9년 차에 위기가 온다고 한다. 3년 차에 나는 시험 합격이 다가 아니었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고 6년 차엔 업계를 떠나야겠다고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때 후배 회계사들에게 유독 자주 들은 말이 있다.

"이걸 어떻게 여섯 번이나 하셨어요?"

허, 그러게 말입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후배들 눈엔 혹시 내가 대단한 포부나 야망이 있어 보였을까? 무슨 생각이 있어서 버틴 건 아니었는데.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은 2년 차 때부터 항상 했다. 입사하고 만 1년을 채울 때쯤 국제회계기준 중에 주요 섹션 몇 개가 대대적으로 개정됐다. 시험 볼 때 공부한 내용을 많이 잊어버렸던 터라 큰 타격은 없었지만 어쨌든 처음부터 다시 공부해야 했다. 그 이후로도 외감법(주식회사 등의 외부감사에 관한 법률)과 관련 기준서는 계속 개정됐고 공부할 내용은 끊임이 없었다.


매년 2월이 되면 나는 이직 준비를 진작에 부지런히 하지 않은 자신을 원망했다. '나 왜 아직도 여기서 이러고 있지.' 3월에는 다음 겨울엔 정말로 여기 남아있지 않을 것이라 매일 결심했다. '내년에는 이 짓 또 못 해.'


그런데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했다. 남들은 출근하는 날씨 좋은 때에 연차를 며칠 붙여 휴가를 다녀오고 나면, 겨울에 흘린 눈물이 기억 안 난다. 동료 회계사들과 "우린 아메바다, 고작 몇 개월 전 고통을 이렇게 빨리 잊을 수 있냐"며 자조했다. 팔에 "이날을 잊지 마. 2월 xx일."이라고 새겨야 하는 건 아니냐는 얘기도 했다.


휴가를 다녀온 뒤 성과급까지 받고 나면 '다닐 만한데?'라는 생각이 들면서 이직하기로 했던 마음을 슬쩍 내버려 두게 된다. 결정을 미룰 때마다 연봉이 올라가기도 하니까… 결국 아무 결정을 하지 않았더니 나는 빅펌에서 6년을 버틴 사람이 되어 있었다. 어영부영.




버티긴 했지만 일을 하면 할수록 정신적으로, 체력적으로 어려웠고 나와 맞지 않는 것 같았다. 중학생 때 학교에서 했던 직업 적성 검사를 다시 해야 하나 싶었다.


일단은 유행하던 성격유형검사를 해봤는데 나는 감정적이고 감성이 풍부하며 혼자 망상하는 걸 즐긴단다. 제일 추천하는 직업은 소설가라고 한다. 아이고. 예상대로 이 일은 나와 맞지 않았구나.


사실 회계사뿐만 아니라 그냥 회사 생활 자체가 안 맞는 거 같단 생각도 들었다. 사회생활을 잘 해내기엔 내성적이고 넉살이나 야망이 없었다. 번아웃증후군이란 게 유명해지면서 아마 나도 번아웃일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지만 누군들 아닐까. 서울살이는 팍팍하고 청춘엔 적성을 고민하기보다 아프기 바빴다.




도망, 혹은 도전이란 핑계를 대고 결국 나는 이직했고 지금은 8번째 시즌(*2)을 로컬 법인(*1)에서 앞두고 있다. 만 7년 사이에 나는 조금 꼰대가 된 것도 같고 뉴스탭(*3) 때보다 연륜도 생겼다. 로컬에서 워라밸을 즐기고 있지만 그렇다고 사람 자체가 변한 건 아니라서 나는 회계 법인 일이 여전히 불편하다. 아직 모든 일에 소심하고 전문가적 자신감도 없다.


적성에도 안 맞고 아직 적응도 못 했지만, 업계를 뜨지 않고 1인분 밥벌이는 하고 있다. 얇게, 하지만 나름 잘 버티고 있는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




* 익명성을 위해 배경과 인물은 일부 각색하였습니다. *


(*1)
법인 형태는 크게 아래와 같다.
빅펌 (Big firm): 대형법인. 빅4 (빅포). 삼일, 삼정, 안진, 한영으로 구성된다. 로펌으로 치면 김앤장, 태평양 같은 곳들. 삼일회계법인이 자타공인 1위. 해마다 새로 입사하는 학생들 사이에 각 법인에 대한 소문이 어떻게 도냐에 따라 인기 있는 법인이 달라진다.
로컬펌 (Local firm): 빅펌 4 곳을 제외한 중견/중소형 법인. 빅펌에 비해 크기가 작다 보니 인프라가 부족한 게 단점이고 그만큼 유연할 수 있는 게 장점이다. 어떻게 일하냐에 따라 돈을 많이 벌 수도, 돈은 덜 벌지만 놀면서 다닐 수도 있다. (현재 나는 후자에 해당)

(*2)
시즌 (Season): 연말에 크고 작은 회사들의 기말감사를 동시에 하게 되는 1월~3월의 바쁜 시기. 자정에 퇴근하면 일찍 하는 편. 제일 바쁜 때는 2월 초중순부터 3월 초중순.
사용 예시) 시즌을 뛴다, 시즌 언제 끝나

(*3)
회계법인의 직급체계
법인마다 명칭이 조금 다를 수 있지만 보통 아래 순서로 진급한다.
스탭 – 시니어 – 매니저 – 시니어매니저 – 디렉터 – 파트너
스탭 중에도 1년 차를 뉴스탭이라고 부른다. 어쏘 (associate)이라고 부르는 법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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