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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률 May 31. 2023

내가 하고 말지 뭐

"인차지(In-charge)"는 영어로 책임이 있다는 뜻이다. 회계법인에서는 보통 감사팀의 현장 책임자를 부를 때 쓰는 말이다. 직급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고 다른 회사에서 팀장, 리더, PM(Project manage)이라고 부르는 역할을 가리킨다. 팀원이 두 명일 수도, 열 명일 수도 있고 내가 3년 차든 8년 차든 인차지를 맡을 수 있다.


인차지까지는 해봐야 어디 가서 회계사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을 수험생일 때부터 들었다. 하지만 들은 것과 다르게, 실제로 같이 일한 인차지들은 별로 중요한 일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세부적인 일은 팀원들에게 다 뿌렸고 회사에서 오는 이메일은 우리에게 그대로 전달했으며 이슈는 이사님이 해결해 줬다. 


그들은 항상 바빠 보이긴 했지만 정작 하는 일은 없어 보였다. 나도 그들처럼 모두에게 일을 나눠주고 가운데서 총괄만 한다면 팀원일 때보다 오히려 더 쉬울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나는 3년 차가 되었을 때 처음 인차지를 하였는데, 인차지로서 첫 이메일을 쓰려는 순간 내가 얼마나 오만한 생각을 했던 건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막상 해보니까 남에게 일을 시키고 중간에서 조율하는 게 제일 어려웠다. 내가 대학교 팀별 과제에서도 팀장 역할을 멀리하고 식당에서 음식이 늦게 나와도 항의하지 않고 그냥 기다리는 사람이란 걸 잊고 있었다.


인차지가 된 후 다시 생각해 보니 이전에 만난 선배 인차지들은 사실 고수였다. 내가 삐걱거리는 자료 요청, 업무 독촉, 일정 조율을 선배들은 별 일 아닌 듯이 해치우곤 했다.


게다가 나는 쓸데없이 공감 능력이 좋아서 팀장임에도 팀원 입장에 과하게 이입하곤 했다. 법인에 인력이 부족한 건 내 탓이 아니고 비지 시즌에 야근하는 건 업계의 당연한 구조인데도 나는 팀원이 야근할 때마다 미안했다. 


그래서 인차지를 맡은 첫 시즌에는 팀원이 해야 할 일도 내가 하느라 야근을 유독 많이 했다. 과하거나 급작스러운 어싸인(*1)이 얼마나 짜증 나는지 직접 경험해 봐서 아니까 쉬이 어싸인할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내가 하고 말지’라 생각하며 혼자 일을 마쳐버리는 경우가 잦았다.




‘보고서일’이라는 마감 기한에 맞춰 여유를 두고 계획을 짜더라도 돌발 상황은 생기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뉴스탭이 연락을 잘 안 받을 수도 있고 거래처가 약속한 날짜에 자료를 안 줄 수도 있다. 그럴 땐 팀원들에게 일을 좀 더 주기도 하고 일정을 당기기도 해야 하는데 나는 그걸 잘 못했다.


시즌 후에 박 이사님께 고충을 토로했더니 이사님은 나처럼 혼자 다 해버리는 게 초보 인차지가 흔히 하는 실수라고 하셨다. 최초 어싸인이 효율적이지 못하고 일정이 밀리다 보면 초보 인차지는 어싸인이나 일정을 조정하기보단 ‘내가 빨리 해치워야겠다’라고 생각하게 된다고 한다.


이사님은 그럴 때 다 돈 받고 일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 보라 하셨다. 각자가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이니 내가 마음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박 이사님은 똑똑하지만 공감 능력이 없는 게 흠이라 생각해 왔는데, 그의 이성적인 조언이 의외로 나에게 제일 필요했던 것 같다. 




퇴사하기 전 마지막 시즌에도 비협조적인 뉴스탭을 한 명 만났다. 그는 연락을 잘 받고 대답도 잘했으나 그게 끝이었다. 다음 주까지는 조서를 꼭 마쳐야 한다는 연락에도 “네, 알겠습니다!”라고 답만 하고 조서는 완성하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일정을 맞추기 위해 내가 조서를 대신 완성했겠지만, 이번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열심히 독촉하고 진도 체크를 했지만 나는 끝까지 “내 눈앞에서 밤을 새워서라도 끝내라"란 말은 못 꺼냈고 결국 그는 미완성인 조서를 품질관리실(*2)에 제출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스탭은 시즌이 끝난 후에 '빌런'으로 소문난 뉴스탭 중 하나였다.


내가 팀원일 때를 떠올려 보면 사실 인차지가 합리적으로 시키는 일에 대해서는 야근하게 되어도 불평하지 않았다. 결국 인차지가 합리적으로 일을 배분하고 구체적으로 지시를 내릴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게 아직도 어렵다. SNS에서처럼 팔로잉만 해도 되는 거면 얼마나 좋을까.


*1
어싸인(assign): 업무 할당. 회계사들에게 거래처를 배정하거나 한 거래 안에서 세부 업무를 나눠 주는 걸 어싸인한다고 한다. 할당받은 일을 어싸인이라고 하기도 한다. 할 일이 없는 날을 언어싸(언어싸인 줄임말, unassign)라고 한다.
사용 예시: 어싸인해서 줄게, 다음 주에 어싸인 몇 개야?, 이 일은 어싸인 누구야?

*2
품질관리실: 심리실이라고도 하고 줄여서 품관실이라고도 부른다. 감사팀의 업무를 검토하고 지식적인 부분을 도와주는 부서. 감사팀에서 놓친 이슈는 없는지, 감사 절차를 제대로 한 게 맞는지 본다. 그래서 감사보고서일 전에 품질관리실에 감사보고서와 감사조서를 제출해야 하고 품질관리실의 승인이 있어야 감사보고서 발행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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