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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률 Aug 09. 2023

오픈 북 테스트

아직도 출근 후 들었을 때 제일 무서운 말은 '회계사님'이다. 회계법인에서 호칭은 보통 '회계사님' 또는 '선생님'이고, 친밀도에 따라 '쌤'이라고 부르거나 반말을 쓰기도 한다. 날 '회계사님'이라고 부른다는 건 새로 시킬 일이 있거나 하고 있는 일에 관해 물어볼 게 있다는 뜻이고 대체로 나는 아무도 날 찾지 않았으면 좋겠다.


회사에서 숨어 지내고 싶은 마음은 동기들도 비슷했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에게 대뜸 '회계사님'이라고 메시지를 보내는 장난을 치곤 했다. 뉴스탭이었을 때 인차지는 왜 꼭 "회계사님 안녕하세요"라고 채팅을 시작했을까. 이 안녕은 안부 인사를 위함이 아니라 독촉이나 리뷰사항을 전달하기 위한 안녕이었다. 그래서 노트북 오른쪽 구석에 '회계사님'이라고 시작하는 대화 미리보기가 뜨면 화들짝 긴장하곤 했다. 




인차지가 되고 나서는 거래처에서 연락이 줄줄이 와서 긴장을 놓을 수가 없었다. 준비되지 않은 채로 거래처 전화를 받는 건 날달걀과 삶은 달걀을 섞어 놓고 아무 달걀이나 머리에 내리치는 복불복 게임을 하는 기분이었다. '제발 아는 거 물어봐라, 쉬운 거 물어봐라, 해봤던 거 물어봐라.'


뭘 물어봐도 대답할 수 있어야 하는 게 전문가 아니냐고 한다면 할 말이 없긴 하다. 하지만 달달 외우는 구구단도 구구단 게임을 하다 보면 헷갈리는 법이고 중학교 때부터 수능 볼 때까지 알았던 근의 공식도 일상에서 안 쓰면 잊어버리지 않나? 


변명을 조금 더 해보자면 회계사는 '1+1=2'처럼 정해져 있는 정답을 찾는 일보다 각 상황에 맞게 판단하는 일을 더 자주 한다. 그리고 의사처럼 분초를 다투거나 생사가 걸린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 그래서 답을 외우고 다니기보다, 상황에 맞는 기준서와 사례를 최소한 10분이라도 찾아보고 답을 정하는 편이다.




모르는 문제는 거래처만 갖고 오는 게 아니다. 그래도 후배나 다른 팀원의 문제는 같이 공부해 볼 수도 있고 그게 싫으면 바쁜 척하며 질문을 다른 사람에게 토스할 수 있다. 이사님 질문에 대답을 못 할 때면 이사님의 똑똑함을 배우면 된다. 거래처가 어려운 질문을 할 때는 그 질문을 패스할 곳이 없다. 바쁜 척을 할 수도 있고 "같이 알아보시죠"라고 능글맞게 넘길 순 있으나 결국엔 내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다.


능글맞게 넘어가는 것도 아무나 하는 건 아니다. 나는 인차지가 된 후 한동안은 '알아야 하는 걸 모르는 것인가, 몰라도 되는 걸 모르는 것인가, 모른다고 거래처에 말해도 되는 것인가'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면서 어떻게든 아는 척을 해보려다가 실수하곤 했다. 


거래처 담당자님이 전화로 회계처리를 물어보면 뭐라도 대답해야 할 것 같아서 일단 "그렇습니다."라고 답할 때가 있다. 끊은 후에 동기들에게 수소문하고 자료를 찾아보니 "그렇지 않습니다."가 정답인 걸 알게 되면 심장이 철렁하고 머리가 지끈한다. 그렇게 회사에 다시 전화해서 죄송하지만 반대로 답했다고 정정하면서 자괴감에 빠졌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전화가 아니라 대면했을 때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회계팀 담당자 말고 영업팀이나 인사팀 같은 현업 부서 담당자와 인터뷰할 때도 많다. 내가 2년 차였을 때 영업팀 담당자와 인터뷰 중 매출 세금계산서는 언제 발행하는지 질문하였다. 

“방금 주신 명함에 공인회계사라고 적혀있던데, 그러면 회계사님이 더 잘 아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담당자의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에 나는 얼굴이 빨개져서 농담으로도 진담으로도 받아치지 못했다. 세금계산서 발행은 회사마다 크게 보면 비슷하지만, 세부적으로는 달라서 나는 해야 하는 질문을 한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하는 걸 질문한 줄 알고 창피했던 기억이 있다.


아직도 난 능글맞게 “그건 저도 모르겠네요, 열심히 공부해 볼게요.”라고 말하진 못한다. 그래도 모를 땐 솔직하게 인정하는 게 잘못된 게 아니란 걸 이젠 안다. 경험해 보니 회사가 아리까리해서 물어보는 이슈는 회계사에게도 아리까리한 게 대부분이다. 그런 이슈에 대해 회계사가 확답하기 위해선 스터디와 논의가 필요하다는 걸 거래처도 알고 있고 이사님도 알고 있다. 


실무는 1시간 이내에 혼자 힘으로 암기한 내용을 가지고 풀어내야 하는 시험이 아니었다. 밤을 새워서라도 자료를 찾아보고, 혼자서 안되면 주변에 도움도 구해서 해결하면 되는 오픈북 테스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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