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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률 Jun 30. 2023

척척박사님 알아맞혀 보세요

'전화해, 말아.'

거래처에 박 이사님 없이 인차지 (in-charge, 현장 책임자, 팀장)로 나가 있을 때 제일 많이 했던 고민이다. 초보 인차지일 땐 이 이슈가 중요한지 안 중요한지, 이슈가 맞는지조차도 애매할 때가 많았다. 그럴 땐 일단 메모장의 '여쭤볼 것' 리스트에 질문을 추가해 두었다. 


이 중에는 이사님과 논의하지 않고 내 판단으로 끝내도 되는 이슈(이런 건 보통 이슈라고 부르진 않겠지만)도 있지만 현황과 내가 생각하는 정답을 정리해서 이사님께 의견을 구해야 하는 것도 있다. 경험치가 바닥이었을 땐 이걸 구분하는 것부터가 나에게 어려운 문제였다.


회계에는 딱 떨어지는 정답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사칙연산이야 정답이 있지만 사칙연산 후의 금액을 어떻게 재무제표에 표시할지는 다른 문제다. 회계 기준서에는 "50g이 넘는 토마토를 수확해라"라고 구체적으로 쓰여 있는 게 아니라, "과일은 잘 익으면 무거워진다"처럼 원칙이 적혀있어서 이런 기준을 상황에 맞게 해석해야 한다.


예를 들어, 내 눈앞의 토마토를 수확해도 되는지 판단해야 할 때 일단 토마토가 기준서에서 말하는 과일의 범주에 들어오는지부터 봐야 한다. 그리고 몇 그램 정도가 되어야 기준서에서 말하는 무거운 건지도 판단해야 한다. 연륜이 있는 박 이사님이라면 "토마토는 정확히 과일로 정의되진 않지만, 과일과 비슷한 특성을 띠니까 저 문구를 준용해도 되겠다. 보통 기준서에서 말하는 무거운 건 30g을 말하는 건데 비싸게 팔 수 있을 정도가 되려면 50g은 넘어야 해."라고 멋있게 말씀하시겠지만 초보 인차지는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마음 같아서는 이게 맞는지 저게 맞는지 헷갈릴 때마다 박 이사님을 찾고 싶지만, 이사님들은 대개 바쁘다. 게다가 초보 인차지가 맡는 거래처는 이사님의 여러 거래처 중에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곳이다. 


이사님은 혼자 끙끙대지 말고 자주 의사소통하라고 말씀하시긴 했지만 그렇다고 모든 걸 여쭤볼 순 없었다. 소심한 탓에 내 눈에는 모든 문제가 중요해 보였고 별일 아닌 걸로 이사님을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았다. 바쁜 시즌이 되면 이사님도 예민해지셔서 내 눈에만 중요한 일을 여쭤보다 보면 짜증 섞인 답을 들을 수도 있다.


3년 차일 때 어느 작은 외국계 회사에 인차지로 감사를 나갔던 적이 있다. 그때 회사는 거래처 채권 금액과 급여 미지급금을 덜 잡고 있었다. 금액이 작았기 때문에 이 정도는 내가 알아서 회사와 결론 내리고 이사님께 말씀드리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이사님이 확인차 별일 없냐고 전화하셨을 때도 이슈는 따로 없다고 말씀드렸다. 그런데 필드 마지막 날 박 이사님이 채권과 미지급금 얘기를 들으시더니 "별일이 있었네!"라며 파생할 수 있는 다른 이슈는 없는지 점검해 주셨다.  


다음 해에 다른 거래처에서는 법인세 계산이 이상해 보였다. 다른 회사에서는 못 본 계산 방식이었고 이상한 촉이 온 이상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열심히 공부하고 계산해서 박 이사님께 내가 생각하는 정답을 가져갔다.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법인세에서 이 부분을 고쳐야 할 것 같습니다.”

“응, 그거 안 중요한 건데. 결국 끝까지 계산하면 결과가 같아야 할 거야.”

연차가 올라가도 삽질은 끝나지 않는구나. 안 중요한 걸 중요하다고 철석같이 믿은 덕에 좋지만 쓸데없는 공부만 한 셈이었다.




연륜의 차이도 있겠지만, 감사인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금액은 없다. 감사인이 감사 목적으로 재무제표를 볼 때 회사 크기와 복잡함에 따라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금액 크기가 달라진다. 그래서 중요하지 않은 금액은 아예 안 보는 감사인도 있지만, 나는 그러기에 간이 너무 작다. 그렇다고 모든 금액을 검토할 시간은 없으니 그 사이에서 나는 아직 중도를 찾는 중이다. 


누가 딱 정해줘서 그대로 따라 할 수 있으면 좋겠다. 평생 주입식 교육으로 컸고 회계사 시험도 그렇게 넘겼는데 이젠 내가 스스로 생각해서 결정을 내려야 한다니. 명함에 공인회계사라 적혀 있으니까 내가 전문가는 맞긴 한데 함부로 결정을 내려도 되나? 


연차가 낮을 때부터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 많다 보니 그 책임감이 부담스러웠다. 도망가려 했을 때 박 이사님은 “시기의 문제이지 어딜 가든 책임은 커질 거고 그 역할을 해야 할 때가 올 거야. 피하는 게 답이 아니야."라 하셨다. 이제는 정말 피할 수도 없는 연차가 되었는데 아직도 정답은 어렵고 어깨는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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