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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률 Jan 05. 2023

먼저 가세요

빅펌(대형법인, Big firm)은 회계사가 성장하기에 알맞은 곳이다. 기본적으로 규모가 크다 보니 지식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다. 이슈를 상의할 수 있는 동기와 선후배 회계사들이 많고 품질관리실에서 리뷰, 교육, 위험 관리를 신경 써준다. 그래서 중소형 로컬 회계법인에 입사했던 회계사들이 1년의 경력을 포기하고 빅펌에 신입으로 입사하기도 한다.


빅펌에 가야 다양하게 경험해 보면서 성장할 수 있다고 하고, 전문직은 성장해야 몸값이 오른다고 하고, 몸값은 올릴 수 있을 때 올려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나도 고민 없이 빅펌에 입사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나는 빨리 몸값을 올리기보다 천천히 한 단계씩 가고 싶은 사람이었다. 이걸 입사하고 나서야 알았다. 그전까지는 사회에서 얘기하는 대로 대학에 가고 직장을 갖느라 바빴으니까. 그리고 바쁘디 바쁜 현대사회에서 뒤처지지 않는 게 내가 원하는 바인 줄 알았으니까.




새 게임을 시작할 때 튜토리얼을 완료하고 몬스터를 몇 번 잡다 보면 내 의사와 상관없이 캐릭터가 레벨업한다. 그리곤 높은 레벨에 맞는 더 어려운 몬스터와 싸워야 한다. 높은 레벨이 되어 더 좋은 아이템을 얻고 더 어려운 몬스터를 잡을 때 희열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 반면, 튜토리얼 게임만 해도 재밌는 사람이 있다. 내가 그렇다. 나는 skip 버튼을 누르지 않은 채로 튜토리얼 게임을 완수하고, 초보자용 맵을 구석구석 여행하는 게 즐거운 사람이었다.


빅펌은 레벨업 속도가 무척 빠른 곳이었다. 빅펌 1년 차에서 2년 차가 될 때 할 줄 알아야 하는 일은 두 배가 아닌 그 이상이 됐고, 2년 차에서 3년 차가 될 때는 네 배 이상이 됐다. 4년 차에는 팀빌딩을 더 잘하는 리더가 되어야 했고 조서 퀄리티는 매년 좋아져야 했다. 


그 누구도 대충 하지 않았음에도 회식 자리에서 "열심히 하면 안 되고 잘해야 한다, 그냥 잘하면 안 되고 더 잘해야 한다"라는 연설을 들었다. 말 잘 듣는 소심한 모범생은 어른들 요구대로 업무를 '잘' 해내려고 무지하게 용을 썼다. 덕분에 배운 게 많고 경력기술서가 풍성해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아무리 작은 일이어도 눈, 코, 입이 있는데 작은 눈, 코, 입까지 항상 빠르게, 잘 그리려고 하다 보니 결국 난 나가떨어져 버렸다. 그게 번아웃인지, 그냥 능력 부족인 건지, 적응 실패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난 빅펌 생활을 끝내고 내 페이스대로 가기로 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학교 숙제로 강낭콩을 키운 적이 있다. 내 강낭콩은 떡잎까지는 잘 나고 키도 쑥쑥 컸는데 그다음 본잎이 안 났다. 본잎이 안 나니 꽃도 열매도 당연히 보지 못했다. 어렸을 때는 큰 게 장땡이었으니 쑥쑥 크는 내 강낭콩이 뿌듯했다. 하지만 그 강낭콩은 결국 떡잎만 한 쌍 달린 채로 키가 너무 커서 제대로 서있지도 못하다가 시들어버렸다.


나중에 찾아보니 내 강낭콩은 웃자란 것이었다. 식물은 햇빛이 부족하거나 기온이 너무 높거나 비료가 과하거나 등 여러 이유로 영양가 없이 키만 클 때가 있는데 이걸 웃자란다고 한다. 나도 강낭콩처럼 빅펌에서 웃자라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6년을 다니고 퇴사하겠다고 말했을 때 윗분들은 빅펌에서 나가면 이제 성장이 어려울 것이라고 나를 만류했다. 나는 같은 이유로 속으로 '오히려 좋아!'를 외쳤다. 앞으로는 지금까지 배운 걸 활용하는 것밖에 못 하고 더 배울 수는 없을 거라고 하는데, 그게 바로 내가 원하던 바였다. 


퇴사하고 로컬 생활을 1년 해보니 그때 들었던 얘기가 무슨 얘기인지는 알 것 같다. 먹고사는 문제가 되어버리니까 빅펌의 교육 인프라가 그립기도 하고 내 페이스대로 하겠다는 여유를 부려도 되는지 모르겠다. 천천히 간다고 해서 잘못된 게 아니란 걸 직접 보여주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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