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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률 Oct 05. 2023

꼰대A

김 군이 격양된 목소리로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다.

“나 얘네한테 화내도 되는 상황이야?.”

들어보니 9시 반까지 오기로 한 팀원들이 10시가 넘어서야 왔다고 한다. 정오까지 품질관리실에 보고서를 내야 하는데 이사님이 검토 사항을 새벽에 주기로 해서 전날에는 일찍 가고 다음 날 오전에 마무리하기로 했다고 한다. 그런데 지각하는 바람에 보고서 마무리도 못 하고 제출해 버렸으니 김 군은 요즘 애들은 책임감이 없다며 씩씩거렸다.  


나도 '요즘 애들'이던 때가 있었다. 책 <90년대생이 온다>에 나오는 90년대생을 맡던 막내였고 팀 어른들에게 "요즘 애들은 달라"라는 이야기를 듣곤 했다. 하지만 빅펌은 매년 적게는 100명, 많으면 300명 이상을 신규로 채용하고 각 팀은 원치 않아도 뉴스탭을 받아야 한다. 그러다 보니 몇 년 만에 나와 동기들은 팀장급의 '젊은 꼰대'가 되어 있었다. 


최근에 김 군이 인차지인 필드에서 팀원들과 같이 퇴근하고 있었다. 같이 걷던 시니어가 저녁을 먹자 했지만 김 군은 선약이 있어서 뒤에 따라오던 스탭 회계사들에게 저녁 먹을 사람이 있는지 대신 물었다. 스탭들이 선뜻 답을 못하고 우물쭈물하길래 김 군은 덧붙였다.

“제가 아니라 시니어 쌤이 저녁 먹는다고 하길래요”

“아 그렇구나, 그럼 선생님 저희랑 같이 드세요.”


김 군은 안 되지만 시니어 선생님은 되나 보다. 김 군은 자신이 친근한 인차지이고 다들 자신을 편하게 생각한다고 믿고 싶어 하지만, 어느새 우리는 8년 차이고 아마 스탭들이 보기에 우리는 어르신에 가까울 것이다.




나에게 꼰대는 박 이사님 같은 어른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사님은 위계질서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회사 일을 인생에서 1순위로 뒀다. 특히, 이사님은 가두리를 좋아했다. 가두리는 물고기를 가두리 양식장에 가둬서 키우는 것처럼 팀원들을 한데 모아놓고 야근하는 걸 말한다. 


코로나가 유행하면서 각자의 곳에서 알아서 일하면 된다는 개념이 생기긴 했지만, 그전에는 모이지 않으면 일하는 게 아니란 생각을 가진 어른들이 많았다. 이사님은 연휴에도 끝내야 하는 일이 있으면 각자 해도 될 것 같은 일도 팀원들을 모아놓고 끝내곤 했다. 사실 모인다고 빨리 끝나는 것도 아니어서 나는 인차지가 된다면 다른 건 몰라도 가두리는 하지 않겠노라 다짐했었다. 


그 다짐을 지키는 게 쉽진 않았다. 언젠가 뉴스탭이 퇴근 전까지 현금흐름표를 검토하기로 한 적이 있다. 현금흐름표는 처음 하면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보통 뉴스탭에게 배정되는 일이었다. 잘 모르겠으면 전기 조서에서 서로 일치해야 하는 걸 맞춰가며 전임자가 미리 만들어둔 검증식에 'TRUE'가 뜨는지 보면 된다.


6시가 되어갈 즘에 뉴스탭이 더는 못 하겠다며 메신저로 결과물 파일을 보내왔다. 파일을 열어봤더니 검증식에 TRUE보다 FALSE가 더 많았다. 모르는 걸 진작 물어봤다면 설명을 해줄 수 있었을 텐데. 퇴근 시간에 완성되지도 않은 파일을 보내고 스탭은 메신저를 꺼버렸다. 메신저를 껐다는 건 퇴근했다는 신호이고 나는 신호를 받았음에도 전화해서 구구절절 설명하고 독촉하고 싶지 않아서 직접 검토 파일을 마무리했다.


이래서 이사님이 우리를 붙잡아 뒀나 보다. 가르치기도 편하고 파일을 던져놓고 퇴근하지 못하게.




박 이사님은 옛날얘기를 많이 했다. 회식할 때면 같은 레퍼토리의 무용담을 몇 번이고 반복하며 요즘 애들은 편하게 일한다고 했다. 그때는 시즌에 거래처를 15개씩 나갔다느니 (요즘 빅펌에서는 10개도 많은 편이다.) 52시간 근로법 같은 것도 없었다느니.


예전에 이런 얘기를 들으면 지금은 그때와 다른 어려움이 있으니까 옛날과 비교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는 나와 내 동기들이 옛날 얘기를 한다. 

“현금흐름표는 원래 밤 새 삽질해서 완성하는 거 아니었어?”


요즘 애들이 특별하게 더 요즘스러운 건지 모르겠지만 같은 90년대생이라도 그들이 다른 세상 사람들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오늘 함께 하기로 한 일 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인차지와 상의 없이 6시에 노트북을 덮어버린다거나, 지방 출장 필드가 집과 너무 멀다며 재택근무를 하겠다고 통보한 뉴스탭들이 있다고 한다. 내가 배우고 해온 것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꼰대가 되어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퇴사할 즘에 나는 박 이사에게 더 공감이 가고 박 이사가 짠해 보이기까지 했다. 따라오지 않는 팀원을 데리고 일하기에 박 이사도 답답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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