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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률 Oct 05. 2023

회계사 예비신부

직장인 익명 게시판을 둘러보다가 외모 평가를 당한 적이 있다. 여자 회계사는 보통 어떤 사람과 결혼하냐고 묻는 게시물이 있었고 거기에 “외모가 별로면 같은 회계사끼리 결혼하더라”라는 댓글이 달렸다. 나는 여자 회계사이고 회계사와 곧 결혼 예정이다. 가만히 있다가 외모가 별로라는 점수를 받아버렸다.


내 외모를 옹호하려는 건 아니지만 회계사 부부는 외모 상관없이 흔하게 볼 수 있다. 동기 커플, 선후배 커플,  소개팅으로 만난 커플부터 수험 생활을 함께한 장기 커플까지 다양하다. 또래가 모인 집단에 야근과 회식이 많다 보니 직급 상관없이 사내 연애가 흔하다. 평소엔 관심 없다가도 야근에 시달리다가 받는 작은 배려에 설레는 게 로맨스 드라마 클리세 아니겠는가. 




나도 야근하다가 입사 동기와 눈이 맞아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만, 계속 그렇게 야근과 회식이 잦다면 가정을 유지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로나 덕에 재택근무를 하던 시즌 주말, 김 군은 우리 노트북과 일할 거리를 싸 들고 와서 합숙하며 일하곤 했다. 눈 뜨자마자 노트북 앞에 앉아 일을 시작했고 식사 시간에 잠깐 유튜브를 보고 다시 늦은 밤까지 일하다 잠들곤 했다. 


회계사 커플이라고 하면 돈 걱정은 없겠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회계법인에서 계속 일하면 고액 연봉을 받는 건 맞다. 대신 그만큼 집에 들어갈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다 보니 회계법인에서 계속 경력을 쌓고 고액 연봉을 유지하려면 가정, 건강, 여가 중에 무언가는 포기해야 하는 것 같다. 우리가 부부가 되고 부모까지 된 후에도 예전처럼 야근 캠프를 한다면 아이가 우리 얼굴을 못 알아보지 않을까.




나는 CPA를 따면 여자가 일하기 좋다고 해서 취업 준비 대신 CPA 시험 준비를 택했었다. 합격생 선배들은 여자가 전문 자격증을 따면 경력 단절 없이 오래 일할 수 있다고 CPA를 홍보했었다. 자격증이 있다는 건 기술을 가졌다는 거고 어디든 기술자를 필요로 하는 곳은 있으니까 자리 나 보수에 욕심을 버리면 어떻게든 이 업계에서 일할 수 있다. 


몇 년을 쉬더라도 어느 자리로든 복직할 수 있는 건 누구에게든 큰 장점이다. 다만, '오래 일한다’라는 게 꼭 커리어를 차근차근 쌓아서 회계법인이나 기업에서 한 자리 차지한다는 말이 아닌 건 나중에야 알았다.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빅펌에서 관리자 직급, 임원급까지 남아 있는 여자 선배 회계사들은 미혼이거나 남편이 회계사인 경우가 많다. 빅펌에 남아 있는 여자 선배들이 많이 없기도 하다. 결혼하고 육아하면서 퇴사한 선배들은 야근이 적거나 퇴근 시간을 고정할 수 있는 곳을 찾아간다.




나는 돈과 커리어보다 워라밸을 택하고 싶다며 빅펌에서 로컬로 이직했다. 대외적으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게 내 솔직한 마음인지는 모르겠다. 나는 결혼을 앞두고 있고 엄마가 될 수도 있다. 누군가는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나도 모르게 학습한 가치를 스스로 강요한 건 아닐까? 내가 가정을 지키는 게 전략적으로 낫다고 합리화한 건 아닐까. 누구보다 로컬 라이프를 충분히 즐기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요즘 대형 회계법인에서는 남자 회계사들이 육아 휴직을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회계법인은 연차 높은 회계사가 퇴사해 버리는 것보다 언제가 되든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한 채로 휴직을 하는 게 더 유리하다. 그래서 복직했을 때 소위 '내 책상이 사라진' 상황은 잘 없다. 나는 요즘 김 군이 육아휴직을 다 쓸 때까지 빅펌에서 버틸 수 있게 응원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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